2007/ 09/ 14
<2007년 중국 윈난 어느 마을에서 찍은 사진>
요즘 사진들 참 많이 찍는다. 주말에 좀 유명하다 싶은 데 가면 사진기자나 들고 다닐 법한 카메라에 삼각대까지 갖춰 든 사람들을 만난다. 사진을 찍으면 가까운 것도 낮설게 보는 눈이 생기나보다. 하늘, 자전거, 골목길... 눈여겨 보지 않던 일상적인 풍경도 프레임 속에 넣고 이리 저리 빛을 조정하면 그림같은 사진들이 나온다. 카메라를 들면 일상 속에서도 이방인이 되는 것, 그 묘미에 사람들은 사진에 빠져드는 것 같다.
더욱이 여행가면 열심히들 사진을 찍는데, 나는 좀처럼 찍지 못한다. 나도 사진을 배워보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지만, 문제는 카메라를 들지 못하는 것이다. '여행에 집중한다'는 나름의 이유도 있지만, 정말 찍고 싶은 풍경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멈칫멈칫하다가 그냥 지나치고 만다. 슬프게도 나에게 사진찍기의 어려움이라는 징크스를 굳힌 결정적 계기가 있다.
호주의 사막,‘세상의 중심’이라고 알려져 유명한 '울룰루-카타츄타' 공원 관광지에서 일 할 때이다. 한 무리의 관광객과 인근 마을 원주민들이 만났다. 이탈리아에서 온 한 관광객이 원주민을 향해 셔터를 누르려고 하자, 한 원주민이 소리쳤다. “이봐, 우린 동물이 아니라고. 우릴 찍으려면 20달러를 내라.” 그는 돈을 받고 태평하게 사진을 찍혀 주었다. 지켜보던 나는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곧 이 거래가 상황에 꽤 적합하다는 걸 알았다. 기이한 물건을 수집하듯, 사진을 찍는 건 마음에 드는 광경을 공짜로 담아 가지려는 것 아닌가.
낯선 곳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게 불편한 이유는 대상을 공것으로 쉽게 취하려는 내 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감상을 표현하는 방법은 글로도, 그림으로도 남길 수 있는데도, 셔터 한 방은 내 것으로 만들기에 너무 쉬운 방법이다.
카메라를 드는 순간, ‘당신은 내 호기심의 대상이요’라고 말하게 된다. 사람들은 특이한 것을 찍지, 평범하고 익숙한 건 굳이 찍지 않는다.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구질구질한’ 살림살이가 낮선 이들에게는 추억이나 낭만이다. 가난한 인도아이들은 먹을 것과 잠잘 곳이 없어 고통스러울 텐데 , 이방인에게는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눈망울’로 기록하고 싶은가 보다.
<아이들을 찍고 싶은데, 카메라를 들이대기 미안해 동행한 친구를 배경으로 멀찍이 찍었다>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는 순간 지나간다. 이러다간 나를 찍지 않는 이상 아무 사진도 남지 않겠다. 이런 불편함이 싫지는 않다. 그러나 훌륭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이 이런 불편함을 무시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많은 고민을 넘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여행에 집중하겠다, 혹은 단순히 귀찮다 든지, 어떤 이유에서보다 카메라를 잡아 들었을 때 나를 바라보는 '피사체'에게 '당신이 나의 피사체'라고 하기가 미안한 가 보다. 무엇을 찍든 ‘나’를 찍는다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한, 카메라를 들기가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