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12
YJ에게
멍하게 있다간 엉뚱한 데서 내려서 헤맬 뻔 했어요. 종점인 백무동에서 내린 다음에, 다시 버스를 갈아 타야 하는 줄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느낌이 왔어요. '이 근처같다.' 그래서 아저씨께 여쭤봤더니, 역시 이 버스는 곧 실상사에서 내려줄 거라네요. 그리고 여기가 바로 실상사 앞이라고. 와우. 난생 처음 와 본 동네인데도 단박에 '여기 참 좋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실상사 가는 길>
<매표소를 들어서면...>
<작게 난 길>
<실상사 가는 길 옆엔 연밭과 논이>
큰 절 앞이면 으레 관광차 수십대는 댈 수 있는 주차장이 있잖아요. 또 나무주걱이랑 염주를 파는 기념품점이나, 산채비빔밥이랑 막걸리 파는 음식점이 줄지어 있곤 하잖아요. 근데 여긴 음식점과 관광용품점은 딱 하나씩 있었고, 작은 매표소 옆에 실상사에서 직접 운영하는 친환경용품점이 있었어요. 신선했어요.
<실상사 안>
입구가 소박하듯, 절도 소박하죠? 신라시대때부터 고찰이라는 명성에 비해 절집의 규모는 놀랍도록 작았습니다. 평평한 땅에 삼층석탑 두개, 그 가운데 법당이 있는 신라의 전형적인 절집 구조였어요. 큰법당이라는 보광전도 아담하구요. 통일신라때 만들었다는 보물인 철제여래좌상은 보수중이었어요. 아예 전각 자체가 해체돼 가건물만 남았고, 그 안에 불상을 모셨어요. 이렇게 위상 높은 절이 건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니 충격적이었어요. 중창을 위해 모금중이라는데 보시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날 정도로..;;
<감꽃홍시 게스트하우스 대문>
한달동안 머물 감꽃홍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어요. '지리산에 있는 한옥집'이란 말에 산 중턱에 있는 외딴 집일줄 알았어요. 지방도가 지나가는 큰 길가 가까이, 집앞에는 면사무소와 파출소, 우체국, 농협, 새마을금고, 보건지소가 있는 다운타운이더군요.
대문이 대로로 향해 나지 않고, 토담을 끼고 둘러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시끄럽지 않고 고즈넉했어요. 큰 길에서 마당으로 들어가는 마을길을 제주말로 '올레'라고 했다죠. 우리말에 왜 그런 단어가 필요했는지 알 것 같아요.
문간에 난 구들방이 한달동안 머물 방이예요.
생태활동가이기도 한 젊은 주인장이 한옥을 예쁘게 개조한 집입니다. 하루에 2만원, 개인 방을 쓸 수 있으니 저에겐 책읽고 산책하기 딱 좋은 곳입니다. 오기 전에 사진을 보여줬더니, '너를 위해 필요한 집이 어떻게 뿅하고 나타났네!'라는 말도 들었어요.
감꽃홍시 게스트하우스 블로그 : http://plain0207.egloos.com
방을 정리하고 실상사로 향하는 뚝방길을 슬슬 걸었습니다. 병풍처럼 높은 지리산이 구름을 휘감고 있는 마을, 뱀사골에서 쏟아져나온 물이 강을 향해 흘러가는 개울을 따라 난 둑길을 걸었습니다. 눈앞에 이렇게 엽서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둑길 옆으로 언덕이 보이는데요, 거기에 올라가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겠죠. 날이 좋으면 오를 생각입니다. 마음이 설렙니다.
<뚝방으로 실상사 가는 길. 죄다 논이다!>
<실상사 초입에 서있는 장승>
경치도 좋고 생활도 편리하고, 또 사람들도 많이 만날 곳에 오니 마음이 들뜨긴 합니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이곳에 온 이유는 오로지 고요히 앉아서 책 읽고 산책하기니까. 인생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고 다시 갖기 힘든 시간이 될 지 모르니까 목적에 충실하자고. 고즈넉한 곳을 찾아 한달 시간 갖기를 얼마나 얼마나 고대했는지 그 마음을 기억한다면 일분 일초도 아끼고 소중하다고 생각해야겠지요.
내일은 마을 도서관에 가볼 참입니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