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만화]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한 '쥐'의 이야기

만화 <쥐> - 아트 슈피겔만



한 폴란드계 미국인이 있었다. 유태인이었다. 그는 결벽증이 심한 아버지가 끔찍하게 싫었다. 어머니는 그가 스무살 때 자살했다. 만화를 그리고 싶지만 치과의사가 되길 강권하는 집안의 압박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다. 마약에 손을 대고,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나중에 그는 '전위 만화가' 대열에 합류했다. 그가 <쥐>의 저자 '아트 슈피겔만'이다. 


그는 어려서 모든 부모가 밤마다 비명소리를 지르며 깨어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부모가 아우슈비츠 공포때문에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는 걸 알게됐다. 68혁명 세대인 저자는 반문명을 주창하는 만화를 그려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쥐'와 '고양이'를 흑인과 백인에 대입한 만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고양이에게 억압받는 쥐의 처지가 차별받는 흑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자신이 이 구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스스로가 백인인데 이런 만화를 그린다면, 백인 자유주의자 밖에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다. 그런데 문득 자신도 억압구조에 직접 관련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유태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우슈비츠에서 극적으로 생존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쥐>가 태어났다고 한다. 



<안네의 일기> 이래로 유태인학살을 소재로 한 수많은 소설과 영화가 있었다. 듣기로는, 독일인들의 자아반성이 (공식적으로) 너무나도 철저해서 이런 류의 작품에 '신물이 난다'는 반응도 있다고 한다. 신나치가 그렇다. 


만화인 <쥐>의 특징은, 학살의 비극적임만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참상을 그려 독자들을 분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건 작가에게 쉬운 일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회상 중간중간에 '알약 숫자를 세거나' '새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는' 아버지의 현재 모습을 넣어 감정의 몰입을 막는다. 산만한 감도 있지만, 감정의 과몰입을 막기위해 작가가 고려한 장치인 것 같다. 


주인공인 작가에게 옛 이야기를 털어놓는 현재의 아버지는 병적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 아들은 '작품을 위해' 아버지에게 아우슈비츠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버지의 증상의 원인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동료의 죽음에도 눈하나 깜박 하지 않고 그의 주머니를 뒤져야 했던 극한 수용소 생활. 그래서 아버지는 안락한 지금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 새로 결혼한 아내에게까지도. 당장 배가 고파 쓰러져도, 탈출을 위해 빵 한조각씩을 반드시 몰래 숨겨야 했던 아버지는, 지금도 먹다 남은 콘프레이크 박스에 다시 풀칠을 해서 환불을 받을만큼 지독한 구두쇠가 됐다. 아우슈비츠에서 목숨은 부지했지만, 지금도 아우슈비츠에 갇혀 사는 후유증과 비극을 보여준 것이다. 


가스실의 비극을 듣고 눈물을 흘리던 주인공이 베란다에 나와 모기가 달려들자, "귀찮은 모기떼들"이라며 살충제 가스를 뿌리는 모습. 본인이 인종차별의 희생자이면서도, 흑인을 '믿을 수 없는 검댕이'라고 비하하는 아버지의 모순된 모습. 이런 작은 부분을 통해 '저자가 아우슈비츠를 박제하려 하지 않았구나, 즉 오락거리의 소재로 삼지 않으려 했구나'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94년에 국내에서 초판 인쇄됐으니 꽤 오래된 만화다. 

그만큼 세월이 지났고 더 자극적인 매체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쌈박하게 읽히진 않는다. 

명성만 믿고 들었다간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가 우리에게 지금 어떻게 남아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데는 좋은 책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백인 자유주의자 한 명'이 되지 않기 위해, 자기 문제를 골몰했다는 저자의 말에 고개가 숙여졌다. 

닳아빠진 좋은 말이 아니라, 내 문제를 깊이 고민하려는 진지한 자세. 


내 문제는 무엇일까? - 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