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영화] 결혼하지 않는 삶을 설명해야 하는 고단함 - 다큐멘터리 두개의 선

두개의 선

감독 : 지민



함께 사는 두 사람의 삶이 행복하기 위해 결혼은 - 필요하기도,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수월하게 살려면 결혼 하는 게 편하다. 안하면 .... 왜 안했는지를 엄청나게 '설명하는 삶'을 살아야 하니까. 평생. 


결혼을 하면 덜 피곤하겠지만, 결혼하면 "온전히 사람과 사람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끼리의 결합으로 묶이게 된다" 는 점은 백만, 천만배 공감이다. 


simply, 부담해야 할 것들


물론 그 재미로 직장을 구하고, 돈을 모으고, 물건을 장만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많다.  

'두 사람이 각자 살아오던 방식을 유지하며, 온전히 둘만의 삶에 집중하고 살자'고 마음먹는다면.  안 할수도 있는 게 결혼.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고 살기로 한다. 뭐, 가족제도에 반대하거나 자유주의를 옹호한다거나 하는 거창한 투쟁 구호를 내 걸지도 않았다. 그냥 '안하기로' 한 것 뿐인데..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8년 연애, 2년 동거하며 재미나게 지내던 커플이 있다.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던 부모님의 결혼생활을 봤던 여자와, '세상이 말하는 좋은 신랑감'은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남자는 혼인신고나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잘 살기로 논의한 터다. 

아이가 생겼다. 주위에서는 '아이에게 죄된다' '비도덕적이다' 라는 말을 하며 결혼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뱃속에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부모는 계속해서 고민을 한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고 아이 성도 엄마를 따르도록 하기로 결론을 지었다. 

아이가 태어났다. 태어난지 6일만에 아이는 대수술을 받게 됐다. 아이가 아프자 부모는 불안함에 휩싸였다. 정부에선 신생아 수술비용을 보조한다고 했지만, 요건에 그들은 해당하지 않았다. 사업이름이 '건강가족 지원사업'이기 때문에 미혼모의 아이에게는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건소 담당자는 '가족이란거, 뭔지 아시죠?'라고, 이미 가족인 그들에게 되물었다. 

결국 출생신고 마감일. 그들은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에겐 아빠 성을 줬다. 아이가 백일 되던 날 양쪽 부모와 일가친척을 모시고 잔치를 열었다. 여자가 말했다. '이상하지, 점차 나는 전통적인 엄마 역할을, 당신은 아빠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남자도 말한다. '이렇게 우리의 의지가 꺾인건가.' 둘은 끊임없이 논의하고 있다. 


결혼. 특히 우리나라에서 결혼은 여전히 온전히 둘만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끼리 얽힌다.


주위에 결혼한 친구들을 보면 주말마다 시댁과 시댁 행사에 가고, 모처럼 가지 않는 날엔 친정도 한 번씩 가야 하고, 불시에 찾아오는 부모님들을 싫은 표정 없이 맞고있다. 심지어 종교를 바꾸기도 한다.. ;;

물론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집안이란 든든한 울타리를 얻은 안락함을 선호하고, '두배의 친척과 지인을 만나 웅성웅성 화목하게 부대끼며 사는게 즐거워!'라고 외치는 친구도 어쩌다 있다. 물론 그런 친구도 집안끼리 얽힘을 일백프로 좋아하지만은 않는다. 싫어하는 친구도 있다. 

헌데 그들이 어느정도 집안과의 얽힘을 받아들이는 이유가 있다. 부모의 애정어린 간섭을 대신, 그들은 집과 혼수를 얻었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대한민국의 집값과 결혼비용을 젊은 부부가 모두 대기란 어렵다. 부모님께 아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할 심산도 있다. 대한민국 보육료는 여전히 비싸다. 영특하고 합리적인 교환인 셈이다. 

어찌보면 결혼에 필요한 비용이 많이 들도록 업체와 언론이 조장하는 것도, 높은 보육료를 유지하는 것도 젊은이들을 결혼이란 제도에 단단히 묶어놓기 위한 게 아닐까 하는 의혹(!)도 든다. (오늘 포털 뉴스 머릿기사에는 <짝>에 출연한 여자 2호가 신혼살림은 잠실에 있는 전세 29평에서 하고싶다고 말했다고 떴다)


주인공 부부는 아이가 아픈 위기상황에서 집안과 국가의 따뜻한(?) 도움을 받았다. 애초 두사람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두 사람의 삶이 행복하기 위해 결혼이 필요할까, 필요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그렇듯이 집안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행복한 삶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선택할 수 있는 결론이다. 그러니 꼭 결혼을 하지 않을 필요도 없다. 혼인신고를 했다고 해서 그들의 뜻이 굽혀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늘 결혼이 두사람의 행복에 도움을 주지만은 않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지도 못하고 헤어지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집안끼리 결합에선 맞춰야 할 조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소득도 비슷, 학벌도 맞고, 번듯한 정규직 직장도 있어야 하며, 양가 종교도 맞고 심지어 궁합도 맞아야 하기도 한다.;;; (여기서부턴 '비상대책위원회' 김원효 말투로-) 이 모든 걸 맞춘 결혼은 가족을 더 동질적인 집단으로 결속하겠지, 그럼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결혼처럼 '안되는 만남' '안되는 결혼'이 많아지겠지. 그럼 아래 대로 내려갈 수록 자녀들은 점점 비슷한 사람만 만나느라 골머리를 앓겠지, 그러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비극도 생기겠지, 아참! 그럼 차라리 쌍놈의 사랑을 선택하겠어요!  



설명해야 하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통념대로 살지 않으면 구구절절히 남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이름이 그게 뭐니?' '왜 학교에 안갔니?' '젊은데 왜 농촌에 사니?' '결혼은 왜 안했니?' '아이는 왜 없니?' ....

설명을 해야 할 대상에 따라서 설명의 강도와 지속도, 그로 인한 피로감도 다를 것이다. 그 대상이 부모님이라면, 슬프게도 부모님이 영영 이해를 못하신다면, 평생 매일매일 진한 강도로 설명과 설득을 해야 할 것이다. 급기야는 주말드라마처럼 "넌 내 자식이 아니다!"라며 영영 얼굴을 보지 못할 비극적인 상황도 도래한다. 

국가가 대상이면 좀 더 피곤하다. '내가 왜 결혼을 안했는지'를 서류에게 설득시키는 작업은 지난하고 고되다.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할 것이다. 호주제 하나 폐지하는데 몇 년이 걸렸더라.. 동성동본 결혼을 허용해 달라고 유림과 얼마나 호되게 싸웠던가. 학교에서 채플을 받지 않겠다는 학생은 얼마나 많은 날을 1인시위로 보냈던가. 국가를 설득하는 일, 서류상의 한 글자를 덜어내고 붙이는 데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 

부모와 사회와 국가를 설득하며 살아야 하는 피로감이 얼마나 큰 지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Yes'를 택하며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학교가, 결혼이, 아이가.... 선택의 문제란 걸 까먹고 고속도로 하이패스 가듯 살아가는 지 모른다. 그리고 하이패스 게이트를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서, '톨게이트를 지나는 법'을 알려주겠노라는 자기계발서가 날개돋힌듯 팔리고 있지 않은가! 일상에서 철학이 사라진 건 선택하는 삶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설득의 피로감에 너무 쉽게 손을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알렉산더에게 '햇빛좀 가리지 마시오'라고 말했던 인류 최고의 시크남 '디오게네스'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통(桶) 속의 철학자'이자, 대낮에 등불을 들고 '인간'을 찾아 외치던 행위예술가이자, 평생 누더기와 겉옷 한 벌과 죽장을 하나 갖고 살았던, 자유로운 윤리적 인간의 원형 디오게네스. 플라톤이 '미친 소크라테스'라 불렀을 만큼 통념과 위선 그리고 야심에 대하여 통렬한 조롱과 야유를 퍼부었던 디오게네스에게도 자신이 칭송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막 결혼을 하려다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여행을 떠날 참에 떠나지 않은 사람들, 정치를 하려던 순간 정치를 하지 않은 사람들, 아이들을 기르려던 차에 아이들을 기르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군주들과 함께 살고자 했지만 그들에게 접근하지조차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놀랍게도 윤리적 삶의 핵심에는 이와 같은 망설임, 주저, 행위의 중단과 같은 어떤 수동성이 자리잡고 있다. 

(중략)

윤리적 인간은 청산과 시장 사이에서, 독신과 결혼 사이에서, 여행과 정주 사이에서, 고독과 사랑 사이에서 해리(解離)된 인간이다. 그 해리를 성찰하는 인간이다.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p. 97~98 

 

세상 사는 재미는 '설명하는 삶'에서 오지 않을까. 

용기가 필요할 뿐! 

"할 수 없어." "해선 안돼." "안되십니다~"를 외치는 세상에 

시크하게 "왜?"를 물어준 그들의 출산기에 용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