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한달] 7. 네, 용기를 얻는 공부 하고 있습니다.
2012. 8. 19
아침에 일어나 차 한잔 마시고, 쥔장 언니가 '기분좋은 산길'이라고 이름붙인 언덕길을 따라 실상사에 갔다. 아침에 조용히 산책을 할 겸, 또 일요일이니 법문도 들을까 했다. 마을 사잇길로 조금만 올라가니, 산이 마을을 품은 모양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실상사 가는 산길에 서있는 '큰돌' 모양새가 특이하다. 나라면 '물개돌'이라고 이름 붙였을 듯>
<실상사 입구 커다란 나무 밑에서 이른 아침부터 옥수수며 산나물, 열매 등을 갖고 나와 판매를 개시하신 할머니들>
<연꽃 하나가 활짝 폈다>
<잎이 하나도 없이 꽃만 있어서 신기한 '상사화'. 꽃이 다 져야 잎이 난단다. 상사병으로 죽은 젊은이의 무덤에서 피었다는 전설이 있다.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
법문을 듣고 집에 오니 쥔장 언니가 마당에 이불을 널고 있었다. 단체손님이 떠나 한꺼번에 방을 치우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고했다.
단체손님들이 냉장고에 남은 음식을 잔뜩 남겨놓고 갔다.
쌀, 봉지카레, 원두커피 티백.. 가장 반가운 건 집에서 담근 것 같은 김장김치와 파김치 한 봉다리씩. 며칠 전에 묵었던 손님은 귀한 천도복숭아를 한봉다리 깨끗이 씻어 야채칸에 놓아두고 가셨다. 뒷 사람 먹으라는 마음씀이 고마워 감사히 받았다.
이틀째 볕이 좋다. 빨래를 너니 금방 뽀송하게 말랐다. 몸빼바지 두 벌 가져가서 이틀에 하나씩 번갈아가며 입고있다. 몸빼가 예쁘다는 칭찬을 들었다. 몸빼의 본고장에서 흣. 신촌에서 이만원이나 주고 샀다하니 다들 깜짝 놀란다. 장터에 가면 오천원에 살 수 있다고.
몸빼는 얇아서 빨아도 금방 잘 마른다. 수돗가에서 빨래비누로 박박 주물러 헹궈, 빨랫줄에 탁탁 털어 널면 기분도 착 - 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빨래하는 시간을 은근히 기다린다.
*
천도복숭아를 몇 개 들고 언니와 함께 다시 실상사에 갔다. 언니가 종종 찾아뵙곤 한다는 원목스님께 차 한잔 얻어마시기로. 스님 계신 다실에 들어서니, 커다란 목재 좌탁위에 절반은 다기가, 절반은 핸드드립 기구와 컵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한켠에는 더치드립기에서 똑똑 커피방울이 떨어졌다.
각을 세워 여과지를 접고 분쇄기에서 갓 갈은 커피가루를 놓은다음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어 '블루문' 커피 한잔씩을 내 주셨다. 느긋한데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이 능숙하셔서 깜짝 놀랐다. '스님 바리스타'께 받은 커피 향이 무척 좋았다.
스님께선 '목금토 학교'란걸 준비하고 계신다고 했다.
나무로 만든 목공품, 금속으로 만든 제품, 흙으로 빚은 도자기. - 에서 이름을 따온 대안 예술학교라고 할까.
중고등 과정을 거친 대안학교 아이들이
제도권 대학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도록 예술과 기술을 갖출 수 있도록 중, 고등, 성인 과정을 연계한 대안학교를 만드려고 하신다고 하셨다.
우쿠렐레를 배우고, 바느질을 새로 배우고, 새로운 모임을 만드려는 언니.
대안학교를 만들고, 강연을 다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스님의 얼굴에서 활기가 넘쳤다.
'이렇게 할 게 많다니 사는 게 즐겁다' 는 말은 정말 오랜만에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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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잔뜩 웅크렸던 마음이 조금씩 펴지고 있다.
'불합격' 통지서를 받을 때마다 '쓸모없음'으로 보인다. "너 따윈 필요 없어." 마냥 '잉여'가 된 기분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할 게 많아!" 라는 말은 오랜만에 듣는다.
시험치는 거에 너무 익숙하게 살았다. 먹고 살려면 저 합격의 문이란 걸 꼭 넘어서 보장된 사원증을 챙겨야만 되는 줄 알았다. '시험 - 합격' 이외의 길은 엄두가 안났다.
학교에선 세달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을 쳐왔다. 12년이 넘게 당락만 반복해왔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마찬가지다. 오히려 좋은 성적은 미끼였던 것 같다. 시험에 길들여지고 말았다. 그래서 시험을 통과해 보장된 길 외에는 두려워서 발을 내딛지 못했다.
'나를 쥐어짜고 살았다' -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않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쉬운 길이 바른 길이다'라는 말씀.
굳이 어려운 길을 위해 나를 쥐어짜고 책망하기, 저 멀리 바늘귀처럼 좁은 '당락'의 문에 나를 줄세워 놓고 '열심히 하면 된다, 나는 저기 들어갈 거다' 라는 자기 암시.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서 말한 것 처럼 '열심히 하면 성공할 것이다'라는 개인과 사회의 주문이 우울증을 키운다.
*
저녁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첫 마디는 "공부 열심히 하고있어?"였다.
책 싸들고 고시공부 하러 산에 들어온 줄 아시는 엄마에게,
"응. (용기있게 살 인생 공부)" 라고 답했는데, 아실랑가..
며칠 지내보니 벌레와 사는 게 익숙해졌다. 오히려 개미 한 마리 들이지 않는 도시의 아파트가 어색할 것 같다.
계절이 바뀌는 걸, 밤마다 찾아오는 벌레가 변한 걸 보고 알 수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밤에 불을 켜놓고 앉아있으면 모기 비슷한 벌레가 들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모기가 없고 대신 귀뚜라미 비슷하게 생긴 곱등이가 방으로 난입했다.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녀석을 잡으려 한참 씨름하다가 포기하고 앉아있었다. '오늘은 이 녀석하고 한 방에서 잠들겠구나.'
방 안 구석에 작은 거미줄이 있다. 거미줄도, 거미도 너무 작아 그냥 뒀다. 잔뜩 웅크리고 움직이지 않기에 죽은 줄 았았다. 그런데 엊그제는 잘못 날아든 모기가 거미줄에 걸렸다. 거미가 엉금엉금 기어가더니 자기 몸집만한 녀석을 잡아먹었다. 거미는 해충을 잡아먹는 '익충'이라고 알고 있었다. 아아. 내가 밤에 살짝 열어놓은 문틈으로 들어온 벌레들이 없다면 방구석의 거미는 쫄딱 굶을 판이었다. 모기가 방에 들어온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런데 곱등이가 바로 그 그물에 오늘 걸렸다. 손톱보다도 작은 거미가 쏜살같이 달려가 그 녀석을 잡아채려 했다. 자기 몸뚱이의 스무배도 넘는 것을. 다행인지, 아직 거미줄이 탄탄하지 않아 곱등이가 빠져나왔다. 그러고보니 어제 쌀벌레를 먹은 거미는 몸집이 커졌다 움직임도 빨라졌다. 거미줄 반경도 넓어졌다. 이제는 내 책상까지 기어오길래, 방을 돌아다닐까 해서 거미줄을 살짝 쳤다. 놀랐나보다. 거미는 다시 잔뜩 웅크리고 움직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