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도쿄타워 vs [영화] 50/50 - 당신이 힘들 때 위로받는 사람은?
소설 <도쿄타워>를 읽고 나서 영화 <50/50>을 봤다. 우연히 연달아 보게 된건데, 보고 나니 두 이야기가 묘하게 공통점이 있었다. 또 대조도 되고.. 둘 다 두 주인공이 역경을 겪으며 외로움을 느낄 때 주변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는다는 점은 같지만, 부모나 가족의 역할에서는 동서양 간 차이가 있었다.
먼저 각각 간략히 소개를 하자면.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릴리프랭키 지음
에쿠니 가오리가 쓴 동명소설이 아니니 주의!
릴리 프랭키는 에쿠니 가오리만큼 한국엔 잘 알려져있진 않지만, 일본에선 일러스트레이터, 소설가, 방송작가, 라디오DJ 등등으로 맹활약하고 있는 인사라 한다. 그의 작품중에 가장 사랑받은 소설이 바로 이 <도쿄타워>이고, 영화와 드라마로도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릴리프랭키 자신의 가족사이자 성장과정을 담은 실화 소설이다.
릴리프랭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60년대 초 후쿠오카의 고쿠라에서 주인공 마사야가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인 그 곳에서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있어도 없는 듯한 존재였다. 사라졌다 휘익 나타나고,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불분명했고, 아들에게도 무뚝뚝했다. TV를 보는 옆에서 앵앵거리던 갓난애기를 럭비선수처럼 휘익 던져버리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 하지만 아들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린 주인공이 배 그림을 그리는데 옆모습만 그리는 모습을 보고선, '배는 앞면도 있고 뒷면도 있는 거여'라면서 손수 나무를 깎아 색을 칠한 멋진 모형 배를 만들어 주었다. 나름의 방식으로 아들을 사랑했다.
어머니는 주인공에게 헌신적이고 따뜻했다. 무뚝뚝한 남편과 고부간의 갈등 끝에 네살 된 마사야를 안고 집을 나왔다. 식당일을 하고 친정 가족들에게 얹혀살면서도 마사야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응원하고 도왔다. 주인공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아부지를 가족이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미 함께 살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부지가 내 '아버지'라는 것을 부정한 적은 없었다.
아부지는 언제나 썬더버드 5호처럼 우주의 어딘가에,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머나먼 어딘가에 둥실둥실 떠있는 듯한 존재였다. 무슨 겨를엔가 훌쩍 돌아오기도 하지만, 또 문득 돌아보면 사라지고 없었다.
무엇을 하는지 잘은 모르더라도 '있다'라는 사실에 어딘가 안심이 되는 존재로서 내 마음속에 항상 있었다.
그리고 엄니는 언제나 썬더버드 2호처럼 콘테이너에 실은 나를 동체에 집어넣고, 지나치게 가까울 만큼 바로 곁에 있었다. 잠시라도 어디로 없어지면 울면서 그 행방을 찾았고 그 울음이 그치기 전에 곧바로 돌아와 주었다. 서로 함께 붙어있는 것으로 하나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거나 같았다.
33쪽 ~ 34쪽
어머니 고향인 후쿠오카의 한 폐광마을은 이웃간 온정이 남아있는 동네였다. 친아들처럼 대해주던 이웃들 사이에서 크게 아버지 없는 결핍을 모르고 자랐다. 유년기를 여기서 보낸 주인공은 막연히 '도쿄에 가고싶다'는 생각을 품게되고, 미술대학에 입학해 도쿄에서 혼자 생활하게 됐다.
어머니가 어렵게 모아주는 학비를 받아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인생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했던 주인공. 4학년 때 유급을 받아 일 년 학교를 더 다녀야 졸업할 수 있었다. 사채를 쓰고, 방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고... 밑바닥까지 방황하던 그는 어머니에게 미안하지만 방황을 멈출 수 없었다.
어느새 적지만 일러스트 일감을 받아 근근히 먹고살 수 있을 때가 되고, 여전히 외가댁에 얹혀사는 시골 어머니가 도쿄에 올라와 시끄러운 월세방에서 함께 살게 된다. 어머니는 여전히 맛깔나는 솜씨로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고, 주인공 애인과 친구, 후배 누구나에게 '젊은이들은 늘 배고프지'라며 정성껏 밥을 지어 대접했다. 예순 아홉이 된 어머니가 아들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주인공이 마침내 어머니가 쓸 넓은 부엌이 있는 삼층집을 마련했는데 어머니가 암투병 끝에 숨을 거뒀다...
책의 주인공은 마사야지만, 사실 어머니에 대한 얘기다. 스토리만 본다면 여느 헌신적인 어머니상과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소설을 돋보이게 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는 단연 어머니였다.
하지만 엄니가 보여준 젊은 시절의 사진을 통해 가히 짐작이 간다고 할까. 당시를 상상하게 해주는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세피아 톤으로 빛바랜 사진에 찍혀 있는 엄니는 하얀 바탕에 큼직한 물방울 무늬가 찍힌 원피스를 입었다. 머리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선글라스를 썼다. 그리고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하얀 오픈 스포츠카 보닛 위에 앉아 기막힌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16쪽.
아들을 위해서는 헌신적인 어머니지만, 아들의 친구들 앞에서 코주부 안경을 쓰고 개그맨 흉내를 내기도 하고, 화투를 정말로 좋아하는 귀여운 캐릭터다. 무엇보다 '어떻게 살아야 옳다'는 기준이 뚜렷하고, 아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치는 에피스드가 풍부했다. 가방끈이 길지 않아도 현명하고 도덕적인 어른의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지하철에서 읽으면 눈물 때문에 곤란하다'는 이 책의 광고문안이 과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가 그런 부분들 때문이다.
나이 마흔 살이 되는 지금까지도 나는 젓가락 쓰는 법이 완전히 엉망이다. 어떻게 잘못되었는가 하면, 도저히 문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다. 게다가 연필 쥐는 법도 상당히 특이하다. 어떻게 길이 들면 그런 식으로 쥐게 되는가 싶을 만큼 이상한 것이다.
게다가 젓가락이나 연필을 이상하게 쥔다는 것을 나는 상당히 나중까지 스스로 깨닫지도 못했다. 엄니가 똑똑히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어렸을 때 찬찬히 가르쳐 주지 않았댜?"
내가 물으면 엄니는 이렇게 말했다.
"너 먹기 편한 방법이면 되지, 뭐."
몸시도 명쾌한 교육관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국면에서는 지독히 꼼꼼하고 엄했다.
초등학생 무렵에 누군가의 집에서 엄니와 함께 저녁 대접을 받은 일이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엄니는 곧바로 내게 주의를 주었다.
"그렇게 첨부터 장아찌를 집어먹으면 안 된다니께."
"왜?"
"장아찌는 밥을 어지간히 다 먹었을 때쯤에 먹어야지. 너무 일찍부터 장아찌만 먹으면 그것 말고는 먹을 반찬이 없다고 하는 거 같잖여? 그건 큰 실례여."
51쪽 ~ 52쪽
엄니에게 돈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래도 어른이니 조금쯤은 저축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혹시 있었다 해도 그 돈을 달라고 할 마음은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나 역시 저금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엄니의 병원 치료도 고려하여,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정도였지만 역시 없었다.
"그래, 하긴 그렇지..."
떫은 차를 마시며 풀이 죽어있는 나를 보고 엄니는 방에 들어가 서랍에서 증서를 넣어두는 종이봉투를 꺼내 오더니 다시 내 앞에 앉았다. 그 봉투 안에는 내가 5년 동안 다녔던 대학의 졸업장이 들어있었다.
엄니는 그것을 펼치며 말했다.
"이것으로 연금이고 뭐고 전부 다 써버렸고만. 이게 내 전 재산이여."
256쪽 ~ 257쪽
아버지와 떨어져 겪은 생활고, 도쿄에서 밑바닥 생활, 어머니의 암투병 등은 모두 등장인물들에게 고난이었지만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다. 힘든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작가의 문장 덕이다. 자기 이야기를 그대로 썼지만 감정에 휩싸이지 않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고난을 극복하는 원동력은 '가족'이었다. 그리고 이 세명의 가족은 어느 한 명도 사회 통념상 '바람직한 가족 구성원상'이 아니었다.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아버지, 예순이 넘어서 아들 집에 얹혀살아야 하는 어머니, 돈을 모아 번듯한 집 한 칸도 얻지 못했던 아들. 그런데 이 셋은 서로 힘들 때 손을 내밀고, 내민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바람직한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이 서로에게 내미는 손에서 의무감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 주변에서도 어려움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가족이 달려와 구해주는 모습을 보곤한다. 그런데 서로에게 의무감과 기대치를 갖고 개입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리기 힘들 때가 많다. 자식에게 사교육을 시키고 힘겹게 대학에 보내는 게 부모의 의무이고, 반대급부로 사회적인 성공을 가져와 노후생활을 보장하는 게 자식의 의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하잖은가. 허나 <도쿄타워>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 것도 해 주지 않는 대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들의 선택에 개입하지 않고 그저 도와줄 뿐이다. 어머니의 사랑이란 우리에게도 익숙하지만, 조금 다르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드라마 <도쿄타워>에 대한 블로그 글을 보다가 '일본에서는 부모가 자식이 결정한 걸 말리지 않아요'라는 포스팅이 있었다. 어떤 일본인이 한국에 와서 살면서 "한국 사람들은 부모님이 반대해서 이루지 못했다는 말을 종종 하는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에선 부모가 자식 결정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문 : http://ildcom.com/drama/tokyotower/main.htm)
'오다기리 조'가 주연으로 영화화 됐다고 했는데, 주인공 릴리프랭키 아저씨의 실제 이미지와 너무 안맞아;;
그보다 후지TV에서 11부작으로 만들었단 드라마를 보고싶다.
일본 문화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게 돼서 재미있을 것 같다. 특히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좋다는데, 그 백년 묵은 항아리에 담은 장아찌를 눈으로 보는 맛도 있을 것 같고.
<드라마 도쿄타워에서 캡쳐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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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0> 조나단 레빈 감독 (2011)
스물여덟살 라디오 피디 아담은 '모아모아' 화산 폭발에 대한 라디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데 심취해 있다. 아름다운 여자친구 레이첼과 함께 살지만 뭔가 잘 풀리진 않는 모양. 그렇게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평범한 이십대 후반을 사는 이 남자는 청천병력같은 희귀암 판정을 받는다. 생존률 50%.
오랜 친구이자 동료 카일은 암으로 여자들이나 꼬시자고 하고, 여자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떠나보냈다. 초짜 심리치료사 캐서린은 심리를 안정시키기보다 뒤집어놓는데, 아무도 없는 적막한 방에 위로해 주는 이는 옛 여자친구가 데려다 놓은 강아지 한마리 뿐인 것 같다.
그는 엄마를 부담스러워한다. 엄마의 극성스러움을 싫어한다. 그래서 병이 있는 걸 바로 알리지도 않았고, 안부를 묻는 전화를 받지 않고 끊어버리기도 했다.
목숨을 좌우하는 수술을 앞두고 그는 극성스런 엄마가 자신을 위해 '암환자 가족 모임'에 열심히 나가고 있고, 장난꾸러기 친구 카일도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심리치료사 캐서린은 어느새 환자와 치료사의 관계를 넘어 진심으로 위로하고 걱정해 주게 됐다. 그는 외로움도 극복하고 병도 극복해 캐서린과 데이트를 시작한다.
.. 는게 줄거리다.
역시 줄거리는 스펙터클 하진 않다. 허나 암 판정을 받으면 이렇게 담담하고 외롭고 막연히 불안하지 않을까. 겪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판정을 받았더라도 이런 심정이었을 것 같다'라고 잘 표현해 준 것 같다. 육체적 고통이나, 사랑하는 연인이 떠나갈까봐 불안하거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당장의 외로움이 가장 크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리뷰에 '암 투병기를 가장 유쾌하게 그렸다'고 썼지만, 나는 외로움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물론, 무신경해 보이던 주변 사람들이 알고보니 주인공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고, 그것을 주인공도 느끼게 돼 외로움을 극복한다는 해피엔딩 덕분에 뚜렷이 드러나진 않지만.
부모와 따로 살고 있는 스물여덟살 아들이 암에 걸렸을 때, 우리나라였다면 당연히 가족들이 가장 먼저 달려오고, 더 좋은 병원이나 치료법이 없나 찾아보고, 수시로 교대를 하며 병상을 지키고, 홀로 사는 아들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 영화는 미국이 배경이다. 주인공이 가족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리고 싫다는 자식 집에 굳이 쳐들어오지 않는 부모도 제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있는 방법 안에서 자식을 걱정한다. '유난히 극성스런 엄마가 부담스럽다'란 이유도 있지만, 성인이 되면 완전히 독립하는 문화가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다. 아픈 자식을 노심초사 걱정하는 부모 마음은 똑같지만, 힘든 상황에 부모가 내미는 손을 잡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의 문화와는 다르다. 물론 마지막엔 주인공이 부모의 마음을 온전히 느끼고 받아들였지만.
이 영화에서도 힘든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는데, 부모로서 가장 친한 친구로서 치료사로서 각자가 맡은 의무감으로만은 돕지 않았다. 의무감 때문에 버텼던 여자친구는 바람을 피웠고, 의사는 극히 기계적인 말투로 환자에게 상처를 줬다. 고로 힘들 때 위로가 되는 사람들은 의무감이 아니라 진심에서 걱정해 주는 이들이란 걸 보여주는 훈훈한 영화. <도쿄타워>와 일치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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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힘들 때 가장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해 봤다.
내가 자식으로서, 아내로서, 동생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고 하더라도 관계 때문에 '당연히' 가장 외롭고 힘들 때 도움을 받진 못 할것이다. 위기시에 도움을 얻으려고 인간관계를 많이 맺은 사람도 결정적인 순간엔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모습에 상처받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설령 가족이라도 말이다.
<도쿄타워>에서 아들과 어머니는 마치 힘들 때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는 친구같았다. '당연히 모셔야 할' 어머니나 '당연히 보살펴야 할' 아들이 아니라.
'당연히' 맺고 있는 관계에
얼마나 진심을 담아왔는지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