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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한달] 14. 엄마와 함께 둘레길 여행

지구별우군 2012. 9. 3. 23:34

2012. 9. 1 ~ 9. 3


김여사님이 내려오셨습니다.



실상사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 풀을 뜯어 만져보고 냄새맡아보고 씹어도 보시는 여사님. 오랜만에 시골에 내려와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나시나 봅니다. 



담날 아침, 둘레길로 향했습니다. 3코스 인월 ~ 금계 구간의 중간지점에 숙소가 있어서 상황마을부터 시작했습니다. 1박2일에서 이 마을에 들렀다가 헬기를 띄워 다랑이논도 찍었다죠. 

다른 길로 가도 되는데 굳이 상황마을로 코스를 잡은건.. 하황, 중황, 상황마을이 여느 마을보다 아름다우니까, 언젠간 시골마을에서 살고싶다고 하면서도 두려움을 갖고 있는 엄마의 마음에 뽐뿌질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코스는 상황마을 -> 금계. 천천히 걸으면 4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역시 상황마을 꼭대기에 있는 참한 황토집을 보고 마음을 뺏기셨어요. 

주인 아저씨가 직접 잡지를 오리고 건축책을 보아가며 만들었다는 꿈의 황토집이라고 합니다. 



금계에 내려와 천왕봉이 잘 보이는 찻집 '나마스테'에서 팥빙수를 먹고, 

버스를 타고 함양으로 갔습니다. 오늘 함양 장날이기 때문에.

함양에 왔으니 천년 숲 '상림'을 빼 놓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둘레길을 걷고, 장터를 헤매느라 지쳤는데 말이죠. 


천년도 더 된 신라시대, 우리가 아는 그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이곳에 현감으로 부임돼 왔다고 합니다. 

그 때 이 지역은 해마다 물난리 때문에 피해를 많이 입었는데.

최현감이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제방을 높게 쌓은 후, 제방을 따라 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이 지역에 큰 물피해가 없었다고 합니다. 주민이 모두 즐기는 천년 숲이 됐고요. 앞을 내다보는 지혜로운 행정가였죠. 과학기술이 발전했다고 해도 차암 근시안으로 땜질하는 요즘 그분들과 참 다르네...



상림에는 각종 연꽃이 가득했습니다. 종류도 가지가지. 





엄마와 딸의 여행은. 

잠시 타인이 되어 보는 기회 같아요.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의 인생에 너무 깊이 관여한 나머지 

마음 편하게 무엇을 즐기고, 느낌을 말하고, 의견을 말할 기회가 오히려 없었으니까요.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보고나서 

엄마가 보낸 문자에 '울컥' 했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날이 하루 생겼네요. 


최근에, 그러니까 이 글을 쓴 지 3년이 지난 2015년 8월에 

김여사님은 나의 남편에게 이 때 심정을 토로했다. 

"애가 공부한다고 지리산에 갔길래 그런가보다 하고 한 번 내려가 봤어. 

가보니 웬걸, 놀고 있는거야. 근데 시골이 너무 좋다고 시골에서 살고싶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 여기서 영영 살겠다고 하면 어쩌나,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 있다더니 시골와서 살겠다는 건가 걱정도 되고. 

근데 올라가는 버스에서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생각이 좁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더라고. 딸이 행복하다는데, 더 바라면 집착하는 거란 생각이 들고.

그날 차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어." 


무심한듯 시크하게 돌아섰던 엄마의 마음은 그랬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