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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깃구깃한 마음을 싹 다린 백양사 산사여행

지구별우군 2012. 9. 19. 00:31


지구별우군 2011.09.05 22:23



"올해 운이 좋다던데."

 이 말을 너무 굳게 믿었던 탔이다. 당장 내년이면 서른이란 나이도 조바심 나게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하고 싶은 일을 찾자.' 다섯 달 동안 나는 학원을 다니고 두어가지 스터디를 했다. 그게 취업준비생으로서 한 일의 거의 전부. 나머지는 그 동안 못 읽은 책 읽기, 사람 만나기, 그림그리기에 기타치기, 봉사활동까지. 엄밀히 말하면 놀았다가 주업이고 취업준비는 부업이었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그렇게 시간이 가는 동안 가고싶던 회사는 서류에서 나를 떨어뜨리고 지나갔고, 나는 왜 운이 좋은데도 자꾸 떨어지기만 하는 거냐며 슬슬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백수로 내년을 맞고 여자 나이 서른에 누가 뽑아주겠는가 하는 조바심에 속을 태워먹게됐다. 서류탈락 발표를 본 날 밤, 나는 짐을 쌌다.




아침 9시 17분. 용산에서 무궁화호를 탔다. 편도가 2만원도 안 되다니.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고, 저렴한 차삯에 위안을 받고 기분 좋게 출발했다. 행선지는 전라북도 장성에 있는 백양사. 가을 단풍이 예쁘다고 소문 난 곳에 단풍 들기 전에 가면 사람이 덜 붐비겠지 하는 심산이었다.




 예전부터 종종 산사여행을 떠났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무슨 일을 해야할 지 몰라 헤맬 때 갔던 쌍계사. 절에서 잘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른채 무작정 갔다가 비를 쫄딱 맞고 스님께 "하루만 재워주세요."했던 게 시작이었다. 이후 회사생활이 힘들 때, 다시 진로가 고민될 때, 순천 송광사, 여주 향일암, 해남 미황사, 여주 신륵사는 나를 재워줬다. 산사가 주는 맑고 장엄한 분위기, 좋은 공기에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과 깔끔한 채식, 스님과의 차담은 몸과 마을을 깨끗이 씻어줬다.

 

 "빈 방이 없는데요."

 "네?"

 "예약하고 오셔야죠. 다음 주까지 꽉 찼어요."

 

6시간 걸려 찾아온 곳이다. 조금 후면 해도 질테다.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아랫 동네에 민박이 많아요. 방법이 없네요."

 

산사에서 고즈넉한 2박3일을 기대하고 온 내게 이런 날벼락이 내릴 줄이야. 넋 나간 사람처럼 서 있다가 나와서 정신을 차린다. 일단 왔으니, 민박을 찾아보자. 발길을 옮기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말할 데 없다. 마치 따뜻하게 맞아 줄거라 굳게 믿었던 친정집에서 박대받은 기분?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올해 운이 좋다더니, 어쩌면 여기 와서도 운은 다 도망가고 없는 거냐고.'





 20분 쯤 내려가니 마을이 나타났다. 가인마을. 아름다운 사람들이 산다는 뜻인가? 마을 이름은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한자를 보니 어짊을 더하다(加仁)이다. 마을 표지판도 깔끔하게 정비됐길래 지자체에서 운영하거나 지원하는 현대식 민박촌인가보다 하고 마음을 놓았다. 10호 남짓한 이 마을 전원이 민박을 치신다. 표지판이 없다면 백양사 골짜기가 품은 영락없는 산골 작은 마을이다. 맨 앞집은 토종닭과 오리들이 마당에서 뛰논다. 이 집도 민박을 치나보다. 헌데 가만히 안쪽을 들여다보니 생각했던 것과 영 딴판이다. 대학교때 무수히 갔던 민박집, 여인숙이라고 할 만한 모습이다. 꼭 닮은 여자아이 둘을 오토바이 앞에 태우고 가던 남자분이 혼자 왔냐고 묻는다. 혼자면 2만원이면 된다고. 아! 저렴하다. 하지만 옆방에서도 쉽게 오갈 수 있는 구조에 나 혼자는 도저히 엄두가 안난다. 씻는 곳도 방문 밖에 있고.. 다음집, 그 다음집도 기웃거렸다.  그 사이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계속 마주쳐 눈인사를 하게 됐다. 너무 여기저기 고르는 것도 실례일 것 같아 게 중 깨끗해보이는 집에 들어가 주인장을 불렀다.

 "혼자야? 3만원인데. 방 봐요. 깨끗해."

제일 깨끗해 보이는 방이었다. 마당 쪽으로 난 벽면은 통유리 샷시로 바깥에서 안쪽이, 안에서 바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여자 혼자라서 유리로 다 보이는 방은 좀..."

아저씨는 좋은 경치가 훤히 내다보여 좋은 방이라며, 부산서 온 분은 며칠씩 여기서 묵고 갔다고 강조했다. 아저씨는 왜 여자 혼자 자는 방이 통유리이면 안돼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아아.. 서울로 다시 돌아가나..'  방 문턱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으로 서울 가는 차편을 꺼내봤다. 해도해도 너무 하는구나. 어떻게 일진이 이렇게도 안좋을까. 억울함이 복받쳐올랐다. 그때, '그래. 내가 여기서 돌아가면 저 운에 지고 말지. 지지 않을테다.' 오기가 솟았다. 그래, 별 일 있겠어?

 

 

 

  씻고 정신을 차리니 해질녘이다. 이러다간 굶겠다. 절에 가서 밥이라도 먹어야지. 염주 알을 들고 나섰다. 사찰에서 머무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은 밝은 날 관광객이 몰리는 시간이 아닌 이른 아침과 저녁 고즈넉한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경황이 없어 아까 제대로 보지 못한 나무와 계곡을 찬찬히 봤다. 이곳이 과연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에 하나로 선정될 법도 하구나! 천연기념물 비자나무부터 아름드리 굴참나무, 가을이면 명물길을 만든다는 무성한 아기단풍나무까지. 절 오르는 길 왼편엔 계곡이, 오른 편엔 나무 숲이 울창히 들어섰다. 절 역시도 정갈하다. 흔히 보이는 높은 산 층층이 대웅전부터 산신각까지 올라가야 하는 배치가 아니라, 평평하게 다닌 넒은 대지에 대웅전, 극락보전, 명부전과 칠성각 모두 같은 마당을 안고 둘렀다. 가람 뒤로 우뚝 솟은 백암산이 병풍처럼 절을 지키고 있다. 대웅전 뒤로 8층석탑은 교과서에서 본 '백제 양식' 그대로였다. 아담했다. 절 입구에 계곡을 잘 다듬어 조성한 연못까지, 정갈하고 따뜻하다는 백제의 것임이 틀림없었다.








  공양간이 있을 법한 곳을 두리번 찾았다. 딱 밥시간이다. 처음 오는 절에도 공양간은 귀신같이 찾는다. 공양짓는 보살님께 인사하고 정말로 반가운 마음에 밥에도 인사를 했다. '밥아. 너 못 먹을까봐 엄청 고심했다.' 밥이라도 얻어먹으니 웬지 절에서 환대받는 것 같다. 내쳐진 것만 같아 서운하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사전 조사도 없이 무턱대고 온 내가 잘못이다. 운은 무슨 운. 다 내가 준비를 안해서 생긴 인과응보다. 하는 일이 잘 안풀리는 것도, 내가 철저히 준비하지 못해서지 어디 운 탓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뒤통수를 때리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저녁먹고 절을 둘러본 후 저녁예불에 참가했다. 엄마 따라 몇 번 따라간 후, 산사에서 지낼 때마다 눈치로 배워 예불하는 법을 알게됐다. 절에 쉬러 온 비 신자에게는 예불이 낯설고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뭐라 하는 사람 없으니 해 볼만한 경험이라 생각한다.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종소리, 스님과 신도들의 독경소리가 한 악장 오케스트라 연주갔다. 산사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절밥 먹고 예불도 했으니 산사 체험은 절반쯤 했다고 치자. 어둠이 깔리기 전에 서둘러 내려와 민박집에 들어갔다. 문을 닫고 커텐까지 꼭꼭치고 앉으니 불안함도 없고 안락하기까지 하다. 잠깐이었지만 문 다 열어놓고 자도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동네 인심이다. 더운 물이 안나왔지만, 땀 뻘뻘하는 한 여름에 덕분에 냉수마찰 제대로 하지 마음이 좋게 먹어졌다. 아까 까탈스럽게 이 방 저 방 고르며 다닌 게 민망하게 떠오른다. 내가 언제부터 좋은 방 가렸냐. 한창 스물 네, 다섯살에는 쥐가 들끓는 백패커스에서도 자고 찜질방에서도 잘만 잤다. 시건 장치가 철저하느니, 더운 물이 나오느니, 침구가 깨끗하니, 이것 저것 가리는 내가 벌써 젊음의 야성보다 중년의 문명에 젖어가는 거 아닌가 서글픈 생각이 든다.

 

   산사여행의 장점은 여러가지다. 특히 여자 혼자 여행가서 잠 잘 곳을 찾을 데는 산사만큼 깨끗하고 안전한 곳을 찾기 어렵다. 또 우리나라 절은 자연경관이 빼어난 명승지에 있고 보물과 유적을 품고 있는 명승지가 많으니, 막상 목적지를 정할 때는 산사로 정하면 실패 확률이 적다. 가서 할 것도 많으니(절 구경, 예불, 산행 등) 관광만 하는 여행보다 덜 심심하다. 말이 없어도 이상하거나 외로울 일이 없다. 산사에서는 모두 말을 아끼기 때문이다.그래서 생각할 일이 많을 때, 혼자 조용히 보내고 싶을 때, 입으로 지은 업이 무거울 때 적격이라 할 수 있다.

 

  단점은, 역시 비 불교도에게는 문화적 이질감과 예식에 참여해야 하나 하는 부담감이 있겠다. 그게 영 힘들면 갈 수 없지만, 그런 낮섦도 한 번 겪어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그다지 어렵지 않으리라. 또 완벽한 탈 문명생활이라 외로울 수 있다. 깊은 산 중 절에는 핸드폰도 안켜지는 곳도 있다. 물론 TV도 볼 수 없다. 할 게 없다면 심심할 수 있으니 책이나 글 쓸 도구, 아니면 그림그릴 도구라도 챙겨가면 나을 것이다.

 

  예전엔 그저 길 가다 예고없이 들러 "재워주세요" 하면 늘 열려있던 곳이다. 요즘은 템플스테이 인기가 많아져 1박에 얼마간 정해진 금액을 내야 하고, 그나마도 예약이 필요하다. 여성분들이 많이 가시면 나야 좋은 게 없지만, 솔직히 추천한다. 구깃구깃한 기분을 펼 땐 산사가 약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