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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안 한 내탓이야' 라고 말하기만 하는 '멘붕 소사이어티'

지구별우군 2012. 10. 26. 01:24

2012.10.25


청년유니온 지역모임에 갔습니다. 

한달에 한번 인근 세개 구에서 온 조합원들이 모이는데, 세 번째 만남이라 처음 보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샐러드 만들다 왔어요."

일을 마치고 헐레벌떡 뛰어왔다는 뽀얀 얼굴빛의 여자분이 자리에 앉자마자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웠습니다. 


"제가 서울에 온 지 몇 년 됐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랑 앉아서 얘기나누는 건 처음이예요." 라고 말문을 튼 그녀는

그동안 주방에서 일하며 겪은 '착취'에 대해 너무나도 말하고 싶었다 합니다. 



"그 분은 텔레비전에도 자주 나오던, 유명한 한식 요리사예요." 

우리 음식을 제대로 배워보겠다고 고향에서 학교도 조기졸업 한 채 상경했던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요리사가 운영하는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삼년인가 사년동안 그녀가 겪은 건 '배움'이나 '전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한만큼 보수도 받았던 '노동'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바닥부터 시작하는 거야.'라는 그들의 말에 '언젠가는 가르쳐 주겠지'라는 마음으로 참길 몇 년. 

이건 분명히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말했지만, 같이 일하는 동료나 친구들, 심지어 남자친구도 '왜 그런 말을 하지? 원래 그런 거 아니냐. 우리가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 서른을 넘겨 몸이 다 망가진 채 일을 그만두는 선배들을 보며 그녀는 여기서는 미래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벽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녀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전부 '우리는 잠시 이 일을 하고 있는 거다' '내가 열심히 안해서 이런 거다'라고 했답니다. 분명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요리사인데, 텔레비전에 나와서 저렇게 고상하고 우아하게 말하는 사람인데, 자기 밑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제대로 보상도 하지 않으며 '가르침'을 빌미로 착취한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이해받았다'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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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의 이해하지 못하는 눈길을 받을 때마다 책하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녀에게는 이해가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구미에서 그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데,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금방 잊어버릴 수 있는 건 뭐죠?

아이들이 떨어져 죽고 있는데, 그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이렇게 무덤덤할 수 있는 사회가 무서워요."


아, 정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싸이랑 김장훈이 싸웠다가 헤어지는 걸 며칠동안 중계받아야 했던 이 천박한 미디어는 뭔가요. 

클릭 수 많은 기사, 리트윗 많은 기사.. 이런 기사 에디팅 방식이 새로운 게이트키핑으로 각광받고, 

좋아요에 트윗에 댓글에 ... 너무너무 많은 정보가 넘쳐나서 

정작 뭐가 중요한 지 알 수 없고 

고통받는 사람의 절규는 '좋아요' '트윗' '클릭'에 묻혀버리니. 


신문 기사에서 읽었던, 바우만이 말한 대로 '너무 많은 가짜 소통'이라는 수용소가 떠올랐다.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개인은 온갖 구속과 한계로부터 해방되어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우만은 이런 선택의 자유란 차라리 저주에 가깝다고 말한다. 집단과 전통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삶 전체를 어깨 위에 짊어지고 홀로 나아가는 개인의 발아래서 유동하는 세계는 붙잡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흘러간다. 바우만은 선택의 자유를 다음과 같은 처지에 비유한다. "얇은 빙판 위의 스케이터가 얼음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는 스케이트를 더 빠른 속도로 지치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는 스케이터의 스케이팅을 자유 의지의 발현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현재와 무엇이 닥쳐올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공포로부터 달아나는 동시에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지난한 노력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더 표면적인 것, 더 즉각적인 것에 몰두한다. 그것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는 부담 없는 임시 정박지와 같다. 예를 들어 살아갈수록 정작 속내를 털어 놓을 만한 친구의 숫자는 줄어드는데 트위터의 팔로워와 페이스북의 친구가 늘어가는 것에 우리는 흐뭇해한다. 하지만 이 만족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리트윗'과 '좋아요' 버튼을 클릭할 때, 우리는 수백, 수천 명과 소통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때의 소통이란 '액션'이 아니라 '리액션'의 연쇄에 하나의 고리를 덧붙이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소통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러한 '유사 소통'의 폐쇄 회로에 갇힌 상태에서 불만족으로의 급락을 다시 만족으로 끌어올리는 해결책이 있다면, 그것은 예전보다 더, 더, 더 많은 클릭을 주고받는 일 뿐이다(주식 시장에서 개미들이 보이는 기민함처럼). 그리고 이런 클릭질의 교환이 결코 끝을 맺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결책은 언제나 임시적일 뿐 본질적으로 무용하고 심지어 더 해롭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더 중요한 것을 상실한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31쪽)


출처 :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921151037

거대한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응답하라, 희망이여!"

[사회학을 전복한 사회학자]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심보선 시인




무언가를 꼭 하고 싶다는 그녀와 함께 

주말에 그녀가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에 가기로 했다. 


"제가 이상한가요?" 개콘 멘붕스쿨 대사 만이 아니다. 멘붕, 멘붕, 멘붕 소사이어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