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20
조선일보 기획르포
"인도 성냥공장서 자살하려 한 소녀 문니스와리" 를 보고 불편한 마음.
http://video.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0/19/2007101900645.html
가슴이 아프다. 소녀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이런 식의 르포를 본다는 게 가슴이 아프다.
이런 르포에서는 누군가의 삶은 그저 구경거리이고, 동정할 대상이 된다.
일이 너무 고되서 홧김에 독극물이 든 녹말풀을 마셔버렸다고 한다.
이 아이는 하루 460원을 벌려고 성냥 공장에 일하러 간다 한다. 부모가 빚더미에 올랐기 때문이다.
인도 전역에 이런 아이가 천만 명이 된다고 한다.
통역사는 목이 메어 울고, 취재를 한 PD도 가슴이 아파했다.
"그렇게 인도 아이들의 삶은 고단하고 쓸쓸하고 처절했다"고 했다.
기사는 두 면을 할애해 문니스와리와 같은 인도 아이들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두 면에 걸쳐 구구절절히 늘어놓았다. 부모가 빚더미에 올라서 아이들은 태어날 때 부터 노동에 발이 묶였다고 한다.
그런데 왜 부모들이 빚더미에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천 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이런 가난과 노동을 겪고 있다고 했지만, 왜 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되는지는 알 수 없다. 14개 언론사가 방영하며, 4 명의 취재진이 달려들었으면서도, 적어도 문니스와리네 부모님이 왜 빚더미에 올랐는지조차도 나오지 않는다. PD는 "그들이 꿈을 꾸며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고 했으면서, 그럼 어떻게 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는 궁금하지 않았던 걸까?
아마 이들은 "이 아이가 왜 이런 삶에 놓였는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인도인의 가난은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눈물을 찍어 내며 성금에 동참하는 것인가보다.
아마 이들은 인도인은 원래 가난하고 가난한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원래 가난하니까, 무력하니까 그저 안타깝고 불쌍하기만 하다. 이 생각의 한 켠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가난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한다. 그리고서는 이 자유로운 경쟁 사회에서 더욱 더 살아남아야 된다고 다짐한다.
이런 생각은 "저 사람의 고통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가능하다. 저 사람의 고통이 나와 관계가 있다는 걸안다면, 차마 '미안해서라도' 저렇게 동정 일색의 카메라를 들이 댈 수 없다. 우리가 싼 공산품을 쓸 수 있는 게 인도나 중국의 아이들이 그렇게 저임금으로 일하기 때문이라는 상식도 잠시 잊었는지. 아니면 나의 풍요와 당신의 빈곤은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우리 시대의 논리가 그 상식마저도 통하지 않게 만들었나보다.
자기 노동자는 해고하면서 막대한 사회공헌 기금을 내놓으면 선량한 기업이 되는 줄 아는 이랜드나, 농민들이 쌀 개방 반대를 위해 상경투쟁 하는 걸 보면서 "농민들 자기경쟁력 강화할 생각은 안하고 불지르고 싸우기만 한다"던 어느 대학생의 냉소처럼 '나의 삶은 당신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시대의 상식 속에서, '그들'의 빈곤은 그야 말로 '타인의 고통'이고, 거기에 던지는 나의 온정은 사치스러운 선행이다.
너무 멀리 나갔나?
식민지 후진국 조선을 담던 일본인의 카메라나, 전근대적 봉건 아시아를 담던 서양인의 카메라와 다를 것이 있는가?
'우리의 아시아(Our Asia)'라는 이름부터 알아봤더랬다.
나는 이런 식의 다큐멘터리가, 르포가 정말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