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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나리타공항의 뒷이야기 - 우리마을 이야기

왜 사회학을 전공하기로 했냐는 물음에 답할 때, 단골로 하는 말이 있다. 

"<상계동 올림픽>을 봐서요."

89년부터 2002년까지 유년시절을 상계동 아파트촌에서 보냈던 나는, 

대학 가서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 <상계동올림픽>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빽빽한 판자촌에서 강제로 철거당한 이주민들의 모습은

아무 것도 모르고 뛰놀던 아파트촌이 숨기고 있던 야누스의 얼굴 같았다. 

성실한 부모님이 힘들게 모은 돈으로 분양받은 우리 집이니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고 해도 

폐허가 된 집터 위에서 엉엉 울고 있던 내 또래 아이의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매끈한 세상이 보여주지 않는 뒷 이야기를 좀 알아야겠다, 그게 사회학을 배우기로 마음먹은 이유였다.   



나리타공항에는 세번 가봤다. 중 3때니까 98년이었다. 외국이라곤 처음 나가봤던 당시, 김포공항에 비해 최신식이었던 <나리타 국제공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공항이었다.  깔끔한 공항. 사무적이어서 기계처럼 보이기도 했던 직원들의 숙련된 태도. '어린 한국 여자'가 입국한다고 입국심사대에서 곤혹을 치렀던 일이 있는지라 (아마 당시 문제가 되던 성매매 여성 밀입국 때문이었을 듯), 내겐 나리타공항의 깔끔한 첫인상이 깐깐하고 무섭게만 느껴졌다.


그 후에도 몇번 나리타 공항을 들렀다. 처음처럼 긴장하지 않게 됐기 때문에 공항에서 여유를 갖고 곳곳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리고 창밖으로 활주로에 수많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모습도 보았다. 하지만 공항 밖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륙할 때 내려다보였던 공항 주변의 작은 집과 논밭은 평화로워보이기만 했다. 그곳의 사람들이 세기에 남을 투쟁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나리타공항>


일본 정부는 66년 나리타 공항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갑작스런 공항부지 결정에 주민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물론 충분한 보상을 약속했다. 형식적인 주민동의 절차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았다.  그 지역엔 전쟁 후 10년이 넘도록 척박한 땅을 개간해 겨우 자리를 잡은 농부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같으면 보상금을 많이 준다면 땅을 팔아버리고 쉽게 이사를 가겠지만, 자기 손으로 농토를 일군 농부들은 쉽게 땅을 버릴 수 없었다. 처음엔 대부분의 주민들이 반대했다. 끈질긴 설득으로 점차 찬성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문제는 여기부터 시작했다. 소수긴 해도 결코 농지를 팔 수 없다고 하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항 오픈은 71년으로' 라고 고위 관료들이 못을 박은 이상 반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회유에서 협박으로 강제 집행으로. 모든 것이 단 5년 안에 이뤄졌다. 경찰과 주민 양 측에서 인명 희생이 있을 만큼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주민 투쟁은 격렬했다. 공청회에서 소리쳐 보고, 정치인과 천황에게까지 탄원서를 내봤다. 주민들은 '반대동맹'을 결성하고, 청년조직인 '청년동맹'과 '소년행동대', '노인 행동대', '부녀자 행동대'까지 결성했다. 데모도 모르던 농사꾼들이 나중엔 망루를 짓고 요새를 쌓으며 땅굴까지 팠다. 아이들은 시위에 참여시키지 않던 부모들도 나중엔 시위에 참여하는 아이들을 자랑스럽다고 할 만큼 오랜 투쟁으로 변했다. 농민단체와 학생조직이 외부에서 가담해 도왔다. 특히 급진적 학생운동조직으로 유명하던 '전학련'이 농촌에 들어와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사일을 거들고, 시위 조직을 돕는 모습은 우리나라 70 80년대 학생운동과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비슷한 건 그 뿐이 아니었다. 아직 농지를 팔 계획도 없는 땅주인들에게 대출문서를 들고 가 땅을 팔고 예금을 유치하는 금융권, 주민들의 목소리는 반영하지 않는 왜곡된 언론, 외부 세력을 '불순분자'라고 몰아 붙이는 정치권. 그리고 한 형제와 이웃끼리 찬성이냐 반대냐를 놓고 갈라서 원수지간이 된 공동체. 새만금과 강정, 원전후보지역 등에서 보았던 똑 닮은 모습들을 볼 때마다 놀라곤했다. 



결국 정부는 1972년을 목표로 한 개항을 단념했고,1978년에야 규모를 대폭 축소해 개항했다. 그리고 1986년 2기 공사에 착공했고, 아직까지도 추가 활주로 공사를 놓고 소송중이라고 한다. 40년이 넘도록 주민 투쟁이 계속돼 온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90년대 들어 과거의 사업강행을 반성하고, 91년부터 93년까지 주민들과 15차례 '나리타 심포지엄'을 열었다고 했으니, 주민들의 끈질긴 싸움이 가져온 성과였다. 이 작품이 "민주주의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뜻하는 말이 아닐까?"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상계동올림픽 스틸샷>


상계동, 신당동, 행당동, 상도동... 그리고 용산에서 재개발로 인해 벌어졌던 비극의 근원은 하나였다. "왜, 그렇게, 급하게?" 누군가는 더 많은 보상을 얻기 위한 줄다리기라고, 또 누군가는 개발 자체가 문제라고 한다. 그런 사람도 있을 테다. 헌데 수년에서 수십년을 살았던 사람에게 '당신의 집을 철거해야겠다'라고 말하곤 짧겐 일년 안에, 길겐 수년 안에 철거를 완료하려고 한다. '왜 이곳이 헐려야 하는지'에 대한 납득, 생각과 마음의 보상도 필요한 것 아닐까?  사업이 지연되면 세금 낭비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돈의 효율성만 따지면 낭비일 수 있겠다. 하지만 국책사업 추진 과정은 기업 행위랑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민주적 절차를 위해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이라면, '낭비'가 아니라 '필요한 비용'이 아닌가 말이다.  권위적인 우리 정부는 '민주적 절차를 위해 필요한 비용' 대신 강제집행과 인명피해를 선택해왔다. 정작 비용을 운운하며 몸달아 하는 이들은 세금을 아까워하는 국민이 아니라 단기간에 자기 치적을 만들어야 하는 정치인과 관료, 그리고 사업권을 따려는 이권업자들이 아닐까. 


<작가의 말>에도 이같은 생각이 들어있다. 


이 작품을 하면서 내가 느낀 또 한가지는 '세월이 흐르는 것의 무서움'이다. (중략) "공항을 서둘러 만들어서 기정사실화하면 반대를 포기할 것이다."라는 권력자들의 속셈에 부응하듯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다. '나리타 방식'이라고 불리며 당시 주민운동의 모범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심포지엄의 결론 또한 예외 없이 잊혀져 가고 있다.


작가는 <명가의 술>로 유명하다. 사회문제에 대한 작품에 집중한 작가가 아니라고 하는데, 왜 이 문제를 7권에 걸쳐 다뤘을까? 그에 대한 설명이 1권말에 나와있어 인용한다. 


(전략) ...

이 만화를 그린 오제 아키라는 1947년생이니, 전형적인 단카이 세대이다. 단카이 세대란 인구학적으로는 1947~1949년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를 일컫지만, 더 폭넓게는 전후 민주주의 세대, 혹은 1960년대 학생운동 세대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오제는 20세에 나리타 투쟁을 목격하기 시작했을 터이고, 45세인 1992년에 이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 된다. 물론 오제는 나리타 투쟁의 당사자도 아니고 이 투쟁을 지원한 학생운동을 직접 경험한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나리타 투쟁을 같은 시공간에서 '호흡'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이 사건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을 것이고, 일종의 '부채의식' 속에서 1992년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동시대적인 '호흡'이 1992년에 결실을 본 것이리라. 


물론 오제가 사회문제만 천착하는 만화가는 아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다른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사회의식을 읽어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출세작인 <나쓰코의 술, 한국어판 '명가의 술'>은 술도가 장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그를 나리타 투쟁으로 끌어낸 것은 단카이 세대로서 나리타 투쟁을 동시대 속에서 '호흡'한 경험일 것이다. 


작가가 나리타 공항 반대 운동을 소재롷 만화를 구상하고 산리즈카를 실제로 방문한 것은 1991년 가을이다. 1991년이라면, 나리타공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관계자들의 대화가 처음으로 시작된 해이다. 이때부터 지삭된 '나리타공항 문제 심포지엄'이라는 이름의 회합은 1993년까지 총 15회 개최되어, 결국 '화해'라는 열매로 이어졌다. 이미 운항중인 공항을 백지로 돌릴 수는 없지만, 주민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공항 건설을 추진한 것에 대해 일본 정부가 지역 농민에게 사죄하고, 계획하고 있었던 일부 활주로 건설을 백지화하며, 향후 토지에 대한 강제 수용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화해'의 내용이다. 1966년에 시작된 싸움이 약 30년 만에 '종결'된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이런 '화해'라는 시대적 공기를 배경으로 출간된 것이다. 

(중략)


이 암중모색의 고단한 나리타 투쟁의 역사과정, 특히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전개가 궁금하신 분에게는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권혁태, 2010)에 실린 '죽음 위에 세워진 나리타 공항'과 '나리타 반대운동의 40년 진화'를 읽기를 권한다.


- 권혁태, 성공회대 일어일본학과 교수.  


다음에 도쿄에 가게 된다면, 나리타공항에서 착륙할 때 주변 집과 논밭을 눈여겨 보게 될 것 같다. 공항에서 내려 곧바로 도쿄로 직행하지 않고, 나리타  시내를 둘러봐야겠다. 작년 <나리타공항 하늘과 대지의 역사관>이 세워졌다고 하니까, 그곳에 들러보는 것도 좋겠다. 


용산이 아무리 국제무역지구로 변모한다고 해도, 용산참사 뉴스 화면에서 일렁였던 화염을 본 이상 불편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기사를 보며 혀만 끌끌 찼던 나도, 용산을 걸을 때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