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에게 맞서기란 쉽지 않다.
소설과 영화에선 독재와 식민지배, 폭압군주에 대항하는 영웅이야기가 수백편도 넘는다. 그건 현실에선 영웅이 드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각시탈은 브라운관에서 맹활약했지만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숨죽이고 살았을 것이다.
우리 오스카도 겁쟁이다. 그에겐 맞설 독재자가 없었지만. 찐따에다 괴팍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자기 처지에서 벗어나지도, 맞서지도 못했다. 마지막 이십여일을 빼고.
눈에 보이는 적이 있다면 저항하기가 더 쉽다. 오스카의 엄마 벨라와, 벨라의 부모는 모두 눈에 보이는 적에 의해 삶이 송두리째 뽑혔다. 그들은 그 적을 '푸쿠'라고 불렀다. 푸쿠는 불행의 신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푸쿠가 보이지 않는 신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고 누누히 강조했다. 바로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트루히요다
소설은 푸쿠와 자신의 인생이 엮이지 않도록 발버둥 쳤지만 빠져나올 수 없었던 삼대의 이야기다. 결국 오스카는 푸쿠의 저주를 벗어났을까.
먼저 트루히요에 대해 알아보자.
라파엘 트루히요(1891 ~ 1961)
31년동안 도미니카 공화국을 통치했던 인물. 구글에 검색해보니 일부는 '경제 번영을 가져왔지만 독재 때문에 부정적 평가를 받고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인프라를 얼마나 많이 만들었던, GDP를 얼마나 늘렸건 중요하지 않다. 그는 말 한마디로 국내의 모든 젊은 여인들을 강제로 침대로 끌여들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온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고 윤리와 질서가 통하지 않도록 만든, 있어서는 안되는 지도자였다.
저자가 트루히요를 설명한 대목을 보라.
원주 1) 이 초짜리 필수과목 도미니카 역사를 듣지 않은 독자를 위해 :
20세기의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 가운데 하나인 트루히요는 1930년에서 1961년까지 권좌에 있는 동안 가공할 폭정을 휘둘렀다. 뚱뚱한 사디스트에 눈은 작고 쑥 들어간 이 물라토는 피부를 표백하고 키높이 구두를 신었으며, 나폴레옹 시대의 복식을 좋아했다. 엘 헤페(대장), 실패한 소도둑, 그리고 쌍판으로도 불리는 트루히요는 폭력과 위협, 대학살, 강간, 흡수정치, 공포정치의 강력하고 친숙한 모든 조합을 통해 도미니카의 정치, 문화, 사회 및 경제적인 삶의 모든 측면을 통치했다. 그는 마치 도미니카가 플랜테이션 농장이고 그가 대농장주인 듯이 나라를 쥐고 흔들었다. 얼핏 보면 중남미 카우디요의 전범인 듯이 보이지만, 이 인간은 어떤 역사학자나 저술가도 이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을 정도로 궁극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우리의 사우론이자 아론, 다크사이드였고, 과거에도 앞으로도 영원할 우리의 독재자였으며, 너무나 기이하고, 너무나 변태인 데다 너무나 무시무시해 SF소설 작가가 지어내려도 지어내기 힘든 인물이었다. 이 작자는 도미니카의 주요 지명을 제 이름을 따서 바꿔 자신의 영예를 드높인 것으로(피코 두아르테는 피코 트루히요로, 신세계의 첫번째이자 가장 오래된 도시 산토도밍고 데 구스만은 시우다드 트루히요로 바꿨다), 모든 국가 유산을 남김없이 독점기업으로 만든 것으로(따라서 그는 빠른 시간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되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 북반구 최대의 군사기지를 만든 것으로(이 빌어먹을 인간은 염병할 전략폭격기까지 갖추었다), 눈에 띄는 매력적인 여자란 여자는 부하의 아내라 할지라도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을 모조리 따먹은 것으로, 국민으로부터 절대적인 경애를 기대, 아니 억지로 짜낸 것으로(국가의 모토가 '신과 트루히요'였으니 말 다했지 않은가), 해병대 극기훈련장처럼 국정을 운영한 것으로, 친구와 아군의 직위와 재산을 아무런 이유 없이 박탈한 것으로, 그리고 거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유명하다.
그의 뛰어난 업적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아이티인과 아이티계 도미니카 국민에 대한 1937년 대학살, 미국을 등에 업은 서구 최악, 최장 독재(우리 라티노가 잘하는 게 하나 있다면 미국의 지원을 받는 독재자를 참아 내는 것이니, 칠레와 아르헨티나라는 강적에도 불구하고 이런 훌륭한 성적을 거둔 것은 가히 부단한 노력의 승리라 아니할 수 없다), 최초의 현대적 수탈, 아니 도둑놈 민주주의의 창시(트루히요는 모부투가 모부투이기 전부터 모부투였다), 미국 상원의원에 대한 체계적 매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것 못지않게 도미니카 국민의 현대화(미국의 점령 기간에 그를 훈련시켰던 미국 해병대가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가 그것이다.
p. 391
트루히요를 소재로 한 소설이 많다고 한다. 2010년 노벨상 수상자 '바르가스 요사'의 <독재자의 향연>이 대표적인데, 소설 <오스카 와오..>에도 이를 재치있게 언급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우리 솔직해지자. '트루히요가 원했던 여자' 얘기는 사실 우리 섬에선 흔한 일이다. 키릴 새우만큼이나. (아, 그렇다고 서인도제도에 키릴 새우가 흔하다는 얘긴 아니지만, 이쯤 말하면 당신도 무슨 뜻인지 알아먹었으리라 본다.) 흔해도 너무 흔해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소재를 쉽게 건질 수 있었다. 그냥 입만 열면 됐다.
* 페루 작가로 트루히요의 가공할 강간과 성 착취를 소재로 한 소설 <독재자의 향연>을 썼다.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1
명망있는 집안의 저명한 의사 아벨라르와 아름다운 간호사 소로코 사이엔 딸이 둘 있었다. 명성과 부, 능력을 모두 갖춰 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그들은 독재자의 시대에 살아 행복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벨라르가 독재에 항거한 건 아니었다. 그는 철저히 독재자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십년쯤 버티면 독재도 끝날거야. 비굴하지만, 그때까지만 버티자'가 그의 심산이었다.
불행히도 그에겐 너무나 아름답고 훌륭한 딸이 있었다. 미모며 학식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그래서 걱정이었다. 고관대작의 아내나 자녀를 불문하고 온나라 여자들을 침대로 불러들이는 저 독재자의 귀에 들어갈까봐 노심초사였다. 아벨라르는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트루히요가 초대한 파티에 딸을 데리고 나가지 않았고, 그 다음날 즉시 악명높은 감옥에 가 무시무시한 고문을 받으며 십사년을 복역하다 죽었다. 집안은 파탄났고 아내와 딸들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단 한명, 아벨라르가 감옥에 들어간 뒤 태어난 검은 아이 한명만 살아남았다. 오스카의 엄마 벨라였다.
#2 벨라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아기 벨라는 가난한 농부집에 하녀로 딸려갔다. 아홉살까지 갖은 노동과 폭력 속에 지옥같은 생활을 했다. 가혹한 주인이 등에 지글지글 끓는 기름을 부었던 날, 기적적으로 고모 라-앙카를 만나 살아났다. 명문가의 자손임을 강조하며 벨라를 사립학교에 보내는 등 고모는 갖은 노력을 해봤지만, 이 말괄량이에 대책없는 소녀는 막무가내였다. 남자들의 침을 홀리게 섹시해진 소녀는 각종 천박한 행동으로 고모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트루히요는 다시 그녀의 운명을 뒤집어 놓았다. 사랑에 빠졌다고 굳게 믿은 벨라. 상대는 트루히요 정권에서 온갖 추잡한 폭력을 대신하는 하수인 '갱스터'였고, 그는 트루히요의 처남이었다. 갱스터와의 사랑으로 팔자를 고칠 생각에 들떠있던 벨라는 갱스터의 아내에게 죽을만큼 맞고 미국으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온갖 궂은 일을 하며 딸 룰라와 아들 오스카를 키웠다.
#3 오스카
140킬로그램의 몸무게, 검은 피부, 둔한 생김새, 입만 열면 SF소설 대사를 지껄이는 그는 동네와 학교에서 공인된 '찐따'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다가가선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4차원 외계어를 건네 상대를 기겁하게 만들곤 했다. 도미니카 남자가 성년이 되기까지 숫총각 딱지를 떼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지만, 오스카는 가능했다.
그에겐 일본만화, SF소설, 롤플레잉 게임이 전부다. 하루종일 움직이지 않고 만화를 보고, 게임을 하고, 환타지소설을 쓴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계속 여자들에게 차이기만 하는데도 그런 상황을 극복하려 하지 않았다.
서른살에 찾은 사랑의 대상은 이웃집 창녀. 그는 예의 집요함과 조심스럼으로 여자의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그녀의 남자친구는 경찰이었다. '도미니카에서는 경찰과의 이혼을 총살이라고 부른다(p.369)' 그는 죽을만큼 맞고 미국에 실려갔다. 생사를 헤매며 자기가 비겁자이고 겁쟁이임을 확인하곤 괴로워하던 오스카. 그에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도미니카로 다시 돌아가 그녀를 만났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찐따의 덜떨어진 행동 같지만, 그는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푸쿠(불행)'과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스무날이 조금 넘는 사랑의 여행 끝에, 오스카는 다시 경찰 괴한에게 끌려가 최우를 맞았다.
삼대의 기구한 인생에서 유일하게 오스카만이 푸쿠와 대적했다. 명망가 할아버지도 전전긍긍하다가 손도 쓰지 못하고 파멸해 버렸다. 자기방식대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던 벨라도 결국 별볼일 없는 아줌마가 됐다. 얼간이, 찐따같은 녀석만이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제발로 찾아가 '사랑해서 기쁘다'를 외치며 죽었다. 무기력한 자기 인생에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 스무날 동안 운명에 한 방 먹인 영웅이 된 것이다.
엄청나게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는 시종일관 코믹하게 그려냈다. 아아. 그의 입담이란, 번역된 한글판만 봐도 기가 막힐 지경인데 원서로 보면 얼마나 감칠맛 날까!(아마 못 알아 듣는게 반이겠지만;;)
비극적이고, 극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분노만을 자아내진 않는다. 그의 재기넘치는 문체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미어터질 만큼 승객을 싣고 쏜살같이 달리는 버스는 밖에서 보면 어디 먼 전장에 여분의 팔다리라도 급히 실어 나르는 듯했다.
P. 319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각종 신문에 '올해의 책'으로 정상을 차지했다며
책 겉면을 장식한 찬사들은, 아마 이런 재기발랄한 문체에도 상당한 점수를 줬을 것 같다.
영화로 나올 계획이라니까 기대해 본다.
저자 '주노 디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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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스카 와오'를 읽고 나서 천명관의 '고래'를 읽었다.
읽고 나니 두 작품이 무척 비슷하단 생각이 들어 깜짝 놀랐다.
둘 다 문단을 '뒤집어 놓았던' 작품이니까. 특히 삼대에 걸친 가족 대서사, 풍부한 인물군, 실존하는 정치와 사회에 대한 풍자를 가상공간과 인물을 통해 환타지로 엮어낸 점, 재기발랄한 입담까지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난 '고래'에 한 표!
우리 민담을 듣는 듯 구수한 언어와 문화에 더 익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한 번 손에 쥐면 놓을 수 없다'고 소문난
이야기 흡입력은 정말 대단했다.
'고래'가 영화로 나오면 정말 재밌겠다 생각하고 검색해 봤더니
'궁'과 '탐나는도다' 등을 만든 송병준 PD가 드라마로 만드려고 판권을 사간 지 오래됐다고.
어서 나오길 기대해 본다.
원래 영화연출이 꿈이라고 했는데.. 연출은 안하시나요? 궁금해서 찾아보니
그 꿈은 버리지 않았다고. ㅎㅎ 궁금하다 그가 연출한 영화는 어떨지. 그가 시나리오를 쓴 작품 '이웃집 남자'와 '북경반점'이 궁금하다.
인터뷰 :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60011
명불허전, '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