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열, 김형재 지음
저자들은 그래픽디자이너다. 이 디자이너들이 왜 촛불시위 군중의 일자별 시가행진을 지도에 표시했고, 날치기 투표가 있던 날 국회 본회의장에서 의원들의 위치를 기표했으며, 지하철 역사에 자리잡은 롯데와 신세계의 입점 진행상황을 도표로 그렸을까?
같은 고민을 사회학자들도 했다. 내가 수업을 듣던 2003년쯤, 미국에서 인기를 얻고있는 사회학의 연구분야라며 '네트워크이론'을 배웠다. 그때 유일하게 네트워크 이론을 가르치던 장덕진 교수님은 요즈음 선거철만 되면 SNS를 통한 유권자 표심을 분석하느라 분주하시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각종 움직임과 데이터들을 도표로 만들어 놓으면 어떤 관계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훌륭한 연구자료가 될 것이다 - 사회과학자들의 관심이다. 헌데 <이면의 도시>에서는 서울 지하철의 호선별 역사의 깊이와 높이, 시청에서 동대문까지 연결된 지하상가 지도, 촛불시민의 동선, 일정 기간동안 서울시에서 일어난 집회시위 지도 등 흥미로운 사건들을 보기 좋게 도표로 만들었지만, 이를 분석하진 않았다. 보기 좋은 도표, 그야말로 미학적으로 제시했을 뿐이다. 사회학적 분석을 기대했기 때문에 다소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습을 시각화 한 디자이너들의 미적 시도로만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그만큼 우리의 움직임은 아름답기도, 기이하기도 했다.
본회의장에서 예산 날치기 하는 날의 동선을 기록한 아래의 표는.. 폭력을 미학적으로 승화한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한다. 슬로우모션으로 BGM은 BeeGees의 'Holiday'정도 흐르고... <인정사정볼것업다> 격투씬 처럼 말이다.
언론에서 '최루탄 국회' '전기톱 국회'라면서 극악 무도한 폭력으로 포장하지만, 격투의 현장에 있었던 나는... 그 물리적 폭력은 귀여웠던 것 같다. 치고 박고 피를 봤던 보좌진도 있고, 정말로 결연하게 날치기 반대를 외쳤던 의원들이 있었지만 패배 후 후유증이 의원들에게 직접적이고 물리적으로 가해지진 않았으니까. 다음 날도 툭툭 털고 양복을 잘 차려입고 의원회관으로 향하면서 언론에 '우리는 열심히 싸웠습니다'라고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 그만이니까. 정말로 무시무시한 폭력이란 당장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다.
정작 슬픈건, 그렇게 통과된 법안이, 예산 때문에 농약을 먹고 자살을 하거나 크레인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애먼 국민들에게 가한다는 것이다. 다툼 없이 의사봉을 땅땅땅 내려친 결과인 고상한 결정이야말로 법과 세금의 피해를 직접 입을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잔혹한 폭력이다. 자, 그런데도 언론은 '국회 몸싸움'을 미개하다고 몰아붙이기만 할 것인가? 그 정도는 의원들이 싸워줘야 국민들이 애통해 하는 마음을 덜지 않겠나.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이들의 문제의식만은 여느 사회학자들보다 날카롭고 투철했다. 재미있는 부분 몇 군데를 인용해보겠다.
CCTV와 같은 실시간 감시, 기록의 도구는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국가의 시민 지배를 나타내는 억압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그러나 근년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지도는 맨해튼의 모든 CCTV의 위치를 기록해서 보여줌으로써 이 CCTV는 사람들이 의식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기하급수적으로 증식되며 도시 공간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중략)... 감시하는 조직으로서 시스템은 항상 개인에 비해 우월한 자리에 서있지만, '맨해튼 감시카메라 지도' 프로젝트의 경우는 역으로 감시하는 눈을 관찰하는 작업을 통해 개인과 시스템 간의 아이러니컬한 관꼐를 재미있게 드러내고 있다. 이 지도는 맨해튼의 모든 CCTV의 위치를 기록해서 보여줌으로써 CCTV의 증식에 대한 주의를 일으키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있다.
... (중략) ... 이들은 이러한 감시시스템을 구축하면서 경찰이 발표한 '범죄 예방'의 목적이 자신들의 안전한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맨해튼의 차이나타운에서 대량의 자본을 소유한 이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임을 깨달았다. 즉, 늘 노출되거나 감시당하거나 추적당하는 입장에 놓이기 쉬운 '보이는' 대상인 자신들이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보는'자의 시선과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CCTV와 같은 감시 장치를 용인하거나 옹호해온 것이다.
p.15 ~ p.17
CCTV를 촘촘히 심어둬서 시민들을 감시 체계로 놓으려는 시도가, 시민들이 CCTV가 어디에 설치돼 있는지를 낱낱히 기록해 공개함으로써 오히려 시민들의 감시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는 얘기. 즉 권력이란 감시에서 나오고, 감시란 정보의 불균형에서 온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저자들은 이와 비슷한 예로, 우리나라 구제역 매몰지 지도를 들었다. 몇년 전 구제역이 일어나자 시민들이 구제역 매몰지 위치를 공개하라고 정부에 요구했는데, 정부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네티즌들이 구글 지도 위에 직접 '우리 동네 매몰지'를 표시해 매몰지 지도가 만들어 졌다. 그때서야 정부가 매몰지 정보를 공개했다. 정보가 곧 힘이라는 걸 증명하는 사례다. 따라서 우리는 권력이 독점한 데이터가 어디에 수집되고 어떻게 이용되는 지를 알아야 한다. 카드사가 수집하는 내 모든 결제내역, 스마트폰 GPS가 저장하는 나의 동선, 포털이 저장하는 나의 검색 기록... 그렇지 않으면 당한다. - 저자들이 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정보를 도해화 하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위 사진이 가장 재미있고 섬뜩했다. 은행에 제공하는 대출신청서에 얼마나 낱낱히 우리의 모든 신상을 소상히 공개하고 있는지를 보여줬다. 대출신청서에 기재한 정보를 글로 풀어내면 그야말로 신청자의 알몸뚱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 된다!
예상처럼 사회상을 분석하는 책은 아니었지만, 흥미롭고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