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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한달] 12. 상추밭 알바

2012.8.31


폭풍우가 쓸고 지나간 가을. 무지하게 청명하고 눈부시닷.! 


궂은 날씨 끝에 맞은 맑은 하늘이 훅 깊어졌다. 태풍 두번에 일주일 내내 비가 와서 산책도 산행도 못하고 내내 집에 들어앉아있었다. 그러니 이런 날 아침에는 식전에 이슬 기운을 느끼며 산길 좀 걸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약수암이란 암자로 향했다. 




암자로 가는 길 옆에 논과 밭, 하우스에는 사람들이 뻘뻘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밭이 없었다. 태풍이 지나갔으니 쓰러진 벼며, 찢어진 하우스를 다시 세우는 등 모두가 열심이었다. 

나만 빼고. 

다들 땀흘리는데 나만 놀러가는 게. 이상했다. 


넓은 비닐 하우스 안에서 혼자 일하시는 아주머니(아니다, 언니다. 나와 열 살밖에 차이나지 않으니) 가 있어서 말을 붙였다. 

"저기요, 혹시 일손 필요하세요? 일당 받고 일 할게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상추를 따는 데도 기술이 필요혀. 

잡아 뜯으면 안되고, 꼭지가 상하지 않게 아래로 지그시 내려 딴다. 그냥 훅 - 잡아 뜯으면 상품성이 떨어져 안된다. 

크기가 다른 상추라도 이파리 궁뎅이쪽이 맞게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

흙이 너무 많이 묻어도 제 값을 못받고, 무엇보다 상추는 주물떡 거리면 안된다. 무르거나 기스나니까. 

헥헥. 



육체노동이 주는 쾌감이 있는 것 같다. 

숙소에 있을 때도 방을 쓸고 닦고, 밥을 차려먹고 또 치우고, 손빨래를 해서 널고.. 이런 일들이 몸과 마음을 활기차게 만든다. 부지런한 할머니들이 잠시도 가만히 몸을 두지 않고 움직이는 것모냥.. 쓸고 닦으면 불안함이 사라진다. 엄마가 계신 집에서는 참 안치운다고 잔소리를 듣는데. 


오랜만에 몸을 써서 일을하니, 내가 생산적인 사람이 된 것 같은 엄청난 뿌듯함을 느꼈다.

그렇다. 자본주의사회에 사는 이상 돈을 벌지 않는 성인은.. 아무리 쉬고싶어 쉰다고 항변해도 식충이가 된 느낌을 스스로 버리지 못했던 거다. ㅠㅠ 

다섯시간에 이만원을 받는다고 해도 너무너무 돈이 반가웠다. 

일도 엉망이고, 시간도 다 안채웠는데도 언니는 오천원이나 더 얹어 주셨다. 

돈을 소중히 주머니에 넣고. 


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보름달이 휘엉청 떴다.  



이렇게 이만오천원을 벌어보니. 돈 이만원이 얼마나 귀한지 새삼 느껴진다. 

이만원... 치맥을 아무렇지 않게 시켜먹었던 돈. 메이커 썬크림 한 통을 겨우 살동말동한 돈.

귀한 돈이구나. 


그림을 그려도, 기타를 쳐도. 돈을 내고 '소비'할 줄만 알았지 '생산' 할 줄은 모르고 살았다. 

썬크림도, 빵도, 상추도 내가 생산하면 덜 소비해도 되는데. 재미도 있는데. 

생산하는 삶을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