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9.6
맥주를 마셨더니 졸음이 밀려와서 자리를 펴고 누웠어요.
방에 하숙하는 파리 한마리가 온 방을 헤집고 자꾸 왱왱거리며 일어나라고 성홥니다.
"마지막 밤에 술쳐먹고 걍 자는 거니" 라고 잔소리 하는 걸까요;;;
*
아침부터 해가 쨍하게 내려쬐는 맑은 날씨였습니다.
비가 와서 자꾸 미뤄뒀던 장터목 산행을 했습니다.
산내삼거리에서 백무동으로 가는 버스가 한두 시간에 한 대 꼴로 있습니다.
동서울에서 내려오는 지리산행 버스 종점인 백무동엔 자정에 출발하는 차를 타고 새벽 4시에 도착해 산행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귀하게' 내려오는 백무동이 여기에선 20분 밖에 걸리지 않는 '동네 산행'인 거죠.
백무동에서 장터목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여정.
올라갈 때 4시간, 내려올 때 3시간이라고 적혀 있는데 딱 그만큼 걸렸습니다. 멈춰서 꽃도 보고 계곡에 다리도 담그고 하며 쉬엄쉬엄 가는 걸음인데도요. 올라가는 길은 계곡을 끼고 걷는 돌계단이 많아서 조금 지루했지만, 험하진 않았습니다.
땅만 보고 걷는 계곡길을 지날 때는
'비슷한 길만 계속 가는 산행은 역시 지루해. 동네 구경도 하는 둘레길이 낫겠어.' 라는 생각을 했는데,
고갯마루에 도착한 후 능선을 타면서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달력그림처럼 첩첩이 쌓인 먼 산들, 골짜기마다 아기자기 숨어있는 마을들, 해발고도가 높아지면서 등장하는 낯선 꽃과 나무... '이런 귀한 구경을 하려면 고생 좀 하는 게 옳구나'라며 재빨리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제까지 장터목은 천왕봉을 가기 위해 거치는 곳으로만 여겼습니다. 종주할 때 천왕봉 일출을 보려고 이곳에서 묵었던 적이 몇 번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천왕봉은 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꼭대기를 갈 필요가 있나요. 장터목만 해도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준비해 간 삶은 감자로 점심을 먹으려는데, 이 동네 산다는 부부께서 소주와 고등어 조림이며 백김치 등 맛있는 안주를 주셨습니다.
올라오는 길에 만난 예쁜(내가 추적자 조형사 닮았다고 했음 ㅎㅎ) 언니와 맥주 한 캔을 나눠마셨습니다. 세석, 벽소령, 노고단 대피소에서 자면서 천천히 지리산을 즐기다 가겠다고했던 언니와 연락처도 주고받았는데, 번호를 잘못 알려드린 모양입니다;; '언니,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요~'
살짜쿵 찍어본 장터목 광경. 안개가 자욱하지만 낮 12시경입니다.
도토리가 바닥에 널려있고, 다람쥐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릅니다.
다람쥐를 몇 마리나 봤는지. 잊을 만 하면 나타나서 계속 '산골짝에 다람쥐~' 노래를 부르며 다녔네요.
**
이곳 지리산게스트하우스에 머문지 이십육일째입니다. 마지막 밤이네요.
딱 필요한 때, 딱 맞는 장소에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쉬었던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가 여러가지 있지만..
첫째, 짐 쌀 때 쾌감을 느낍니다.
이번 여행에도 딱 필요한 만큼 잘 싸왔어요. 적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고. 몸빼바지 두 벌에 티셔츠 두 장, 등산바지랑 잠옷추리닝. 한 달 살아도 불편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여행가방 쌀 때 마지막에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하나씩 하나씩 덜어내곤 하는데 그 때의 짜릿함이란. 인생도 이렇게 간소하게 살면 되는데요. 짐 싸면서 쓸데없는 욕심이랑 고민도 덜어버리게 돼요.
내가 사랑한 몸빼
둘째, 오직 지금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차는 어디서 타지, 몇시에 있지, 배고프니 밥을 먹어야겠다, 잠은 어디서 잘까, 와! 저기 재미난 게 있네... "
여행할 땐 상념에 잠길 겨를이 없어요. 눈 앞에 해야 할 일이 계속 생기니까요. 그리고 새롭고 재미난 구경거리가 끊임없이 나오죠. 마음이 복잡할 때 여행을 다녀오면 가벼워지는 이유는, 이렇게 오직 현재에 집중하면서 잡생각이 사라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계산을 버리고 단순해 지잔 말이지."
인월에 있는 카페 <제비>에서 손으로 깎은 주사위를 발견
이번 여행에서 제가 얻은 화두는 '나는 깻잎같은 사람인가' 입니다.
스님께서 제 고민을 듣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저기 깻잎을 보세요. '저 여깄어요' 라면서 티내지 않고 조용히 바람에 움직일 뿐이잖아요. 저기 깻잎 중에 으스대는 깻잎이 있던가요, 저 잘났다 뽐내는 고추가 있던가요."
우와. 맞지요. 깻잎 한 장이 무리에서 더 잘났다고 뽐내봤자 우리 눈엔 티도 나지 않는데. 잘나봤자 깨나무 한줄기에 달린 깻잎 중 하나일 뿐이지요. 고만고만한 깻잎이 아등바등 더 잘하겠다고 애쓰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실망하진 않잖아요? 그냥 제 자리에서 원하는 만큼 물을 흠뻑 빨아들이고 햇볓을 양껏 쬐면 행복하고 훌륭한 깻잎이죠.
일 할때 '잘 하려고 하는 마음' 그래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고통을 만들죠.
"몸은 부지런히 놀리면서도 마음은 휴식처럼 고요할 수 있어요."
깻잎같다면 말입니다.
깻잎같은 마음으로
여행하듯 가볍고, 단순하게, 발견하는 작은 것에 감탄하며.
집에 가서도 그리 살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습니다.
하다 안되면
또 쉬러 오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