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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친구에게 배운다

2011.06.11 00:35


나는 좀처럼 무엇에 푹 빠지지 않는다. 하나를 잡으면 또 하나가 눈에 들어와서 하나에 진득하게 빠져들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어린시절, 나를 푹 빠지게 했던 것이 몇 가지가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만화다. 조금만 더 진지했더라면, 지금쯤 난 만화를 그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4, 5학년때 부턴가. 이모와 오빠가 보던 만화책을 잡은 게 시작이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전질을 사서 보고 또보고, 종이 뒤에 먹지를 대서 따라그리고 하느라 책이 나달나달해졌다. 오빠가 보던 '쿵후소년', '열혈강호' 가리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만화대여점에 달려갔다. 기다리던 신작이나 좋아하는 작가의 숨겨진 작품이라도 발견하는 날엔 가슴이 그렇게 두근거릴 수 없었다. 내키는 날에는 1권부터 22권까지 빌려와 한숨에 읽기도 하고, 매달 몇 종류의 만화잡지를 구독해 봤다. 그러다 보니 숙제도 잊고 학원도 빼먹기도 했다. 엄마의 감시를 피해 빌려온 책은 피아노 의자 뚜껑을 열고 숨겨 놓기도 하고, 옷장 깊숙히 감춰놓곤 했다.

 

나의 만화사랑이 절정해 달했던 중학교 2학년때. 같은반 J를 만났다. 만화를 정말 잘 그렸다. 그림솜씨가 탄탄해서인지, 움직이는 동작이나 관절,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등 그리기 어려운 것도 척척 그려냈다. 그애만큼 만화를 좋아하던 M, Y와 함께 우리 넷은 동호회를 만들었다. '비리디티(Viridity)' 초록, 신선한, 미숙함 이라는 이 단어는 셋 중 누군가가 밤 새 사전을 뒤져 찾아낸 단어. 토익 단어보다 수준높은 이 어휘를 도대체 어떻게 찾았는지 모르겠으나, 발음만큼 뜻도 예쁜 이 이름을 짓고 몹시 흥분했던 것 같다.

 






진지했다. 동인지에 실을 작품을 그리느라 일주일은 꼬박 샜던 것 같다. 나는 셋 중 제일 그림도 못그리고, 스토리도 진부했다. 무엇보다 열정이 가장 적었다. 나에게는, 만화는 그저 취미니까. 이 친구들에게는 취미 이상이었다. 만화는 곧 꿈이었다. 열정이 가장 뒤쳐진 나는 활동도 뒤쳐졌다. 고등학교 진학과 더불어 나는 활동을 흐지부지 하다가 친구들과 연락도 끊겼다. 아마 이 친구들은 만화와 관련된 어떤 일이든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J는 반장이었다. 그림도 잘 그리지만, 공부도 잘했다. 전교에서 손꼽힐 정도였다. 나는 늘 그애가 궁금했다. 선생님이었던 그애의 엄마는 당연히 J가 공부를 주업으로, 그림은 취미로 할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J는 항상 그 부분에서 명확했다. "난 그림을 그릴거야." 나중에 들은 바로는, J는 엄마와 고등학교 3년 내내 부딪혔다고 한다. 공부를 못했다면 갈등할 필요도 없을텐데. 사람들은 모두 그애가 결국 공부를 선택하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공부와 그림 둘 다 뛰어난 J. 나는 그만큼 잘하는 게 없었다. 내가 무얼 좋아했는지도 다 잊고 고등학교 가서는 열심히 공부만했다. 그리고 부모님이 좋아하실 대학에 갔다. 여전히 무엇을 좋아하는 지 모른 채로 졸업을 하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더이상 좋아하지 않는 일을 꾸역꾸역 할 순 없다고 생각하고 일을 그만뒀다. 다시 좋아하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 즈음 중학교 친구 결혼식에서 J를 만났다. 전날 밤, 그애를 만날 생각에 나는 너무 궁금해 잠이 오지 않았다. 공부와 그림. 그녀는 무얼 택했을까?

 

J는 여전했다. 조용하지만 뚜렷한 얼굴과 말씨. 그녀는 그림을 택했다고 한다. 어머니와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마셨단다. 방황도 했겠지만 밴드활동도 하고, 여행도 하고, 그녀 스타일 대로 살았던 것 같다. 지금은 작은 가게를 내서 구체관절 인형 메이크업을 하고 있단다. 크게 알아주지도, 돈이 되지도, 안정되지도 않는다 하더라도 그녀는 그녀 방식대로 잘 살고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커 보이는 떡을 자신있게 외면하고 자기길을 택한 그녀. "안정되지는 않아." 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애가 세상에서 제일 단단해 보였다. 자기 인생을 자기 기준대로 산다면 결코 불안하지 않으리라.

 

그날 J를 보고 이것 저것 재 보며 한없이 작아보이던 내 앞길이 한결 탄탄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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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2012. 9. 16


며칠 전 J를 다시 만났다. J의 사무실에 찾아갔다. 그녀는 직원을 네다섯명이나 둔 회사의 어엿한 사장님!이었다. 인형을 디자인하고 직접 얼굴을 그려넣는 일을 하는데, 일손이 모자랄 정도로 잘 되는 것 같았다. 


*

지리산에 있을 때 그녀가 굉장히 보고싶어졌다. 

'내가 아무 목적의식 없이 오롯히 좋아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다가, 만화와 그녀를 떠올렸다. 

학창시절엔 학업 외엔 모든 게 '시간낭비'였다. 성인이 돼서는 생업 외엔 모든 게 '쓸 데 없는 짓'이었다. 

생산성이 중요한 이 경쟁사회에서는 굳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취미와 선호는 '낭비'로 여겨졌다. 돈 낭비, 시간 낭비. 좋아하는 걸 하는 데도 죄책감을 느꼈으니까. 

- 라고, 이렇게 남의 탓으로 쉽게 돌려버리곤 한다. 


탓을 해야 한다면 성숙치 못했던 내 탓이었다. 

좋아하는 것과 공부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던 친구,

맞지 않는 학교생활을 그만 둬야 하지 않을까 방황하던 친구, 

학생회장이 되어 뭔갈 바꿔보겠다고 나섰다가 친구들의 무관심과 선생님들의 비난에 시달렸던 친구. 

그 친구들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참고 나중에 대학가서 하면 되잖아."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나는 아무 고민과 방황 없이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지'란 생각조차 없었다. 

'그냥 학생은 공부해야 하는 거니까. 생각은 나중에' - 라고 생각하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나이가 들면서 그 바보같음이 

부끄러웠다. 



오늘 J를 만난 이유도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뜬금없는 방문에 조금 놀랐을 그 친구는

내가 털어놓는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들어주었다. 


그녀는 "난 네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실린 것 처럼, 그렇게 잘 살았을 줄 알았어." 라고 했다. 나의 고민과 반성에 조금 놀란 듯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았던 거야." 나는 '이제서야 오래 전 방황하던 너희들이 이해 갔노라'고, 너의 길을 선택한 용감함을 보고 내가 무엇을 잘못생각했는지 깨달았노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도 하고싶은 걸 하고있지는 않다고 부끄러워했다. 자기도 일을 하다보니 좋아하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좋아하는 게 뭔지 생각할 만큼 여유를 가지고 살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


밤에 그녀에게 카톡을 받았다. 

운동장을 돌고 있다가 문득 생각났다며 보낸 글은


"동인지 만들 때 있잖아, 내가 같은 반 S를 놀리는 만화를 그렸거든. 네가 막 혼냈어. 가끔 생각했는데. 그댄 정의로웠소." 


그랬나? 

'아주 생각이 없지는 않았나보다'라고 킬킬대며 답했다. 

서로 갖고있는 기억의 조각이 커 가면서 조금씩 자기를 변하게 하는 것 같다. 

오래된 친구를 찾기를,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