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지 <작은것이아름답다>를 지난 달부터 구독해보기 시작했다.
오늘 받은 2017년 1-2월 합본호에서 재미있는 글들이 많았다.
그 중에 권혁수라는 원로 디자이너의 강연기록에서 눈 번쩍 하는 글귀가 몇 가지 있어서 적는다.
부산에서 만난 아마릴리스를 보며 '에코의 역할'을 생각했어요. 내가 선배라고 '야, 인생은 이런 거야!'하는 게 아니라, 그 친구들이 뭐라고 말 했을 때 내가 복창해주는 주는 역할이 더 의미 있다 싶더라고요. '선생님, 삶이란 이런 것 같아요.' '그래요. 그렇지요.' 내가 에코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렇게 운동이 시작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작은것이아름답다>, 244권, 75쪽)
아마릴리스라는 꼿을 봤는데 수선화과 꽃이었고, 그래서 그는 수선화에 대한 신화를 떠올렸다. 나르키소스를 사랑한 에코가 구애를 했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했다는 것. 에코는 헤라의 저주로 자기 말을 못하고 다른 사람 말만 따라할 수 있었다. '어디서 왔니?' 하면 '어디서 왔니?'라고만 대답하는. 대부분, '에코'에 대해선 앵무새처럼 따라만 하는, 그래서 닮고 싶은 존재로 묘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수동적인 존재에 대해서 좋아하는 사회는 아니니까.
그런데 이 분은 그렇게 남말만 따라하는 에코를, 수선화를 보고 떠올린 권혁수 선생님은 자신이 후배들에게도 에코같은 존재가 되면 좋겠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식물성', '수동성'을 아름답다고 닮고싶다고 표현한 글은 처음 보았다. 그 겸손함에 경탄했다.
내가 사라지는 것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다음 삶을 위한 배려, 힘이 없는 것은 약해진 것이 아니라 힘 있는 세계에 대한 예의, 다른 사람이 활동하기 위해 자리를 비워두는 거예요. 눈이 침침하고 앞이 안 보이는 것은 다음 사람이 보고 말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같은책, 76쪽)
눈이 침침하고 아파서 안과에 갔는데 안과의사가 "굳이 그 책을 봐야겠느냐?"며 "자연스럽게 그만 보는 것도 좋지 않겠냐"며 눈이 아프지만 않게 약을 처방했다고 한다. 그 경험을 통해 그는 나이들어감이 억지로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수술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나이들어감을 '식물성에 가까워지는 과정'이라고 했다.
이 글의 전체적인 주제는, 나이들어감을 '식물성'에 가까워지는 과정으로 표현했다. 젊을 때는 동물성에 가까웠고, 점점 느려지고 퇴화되는 것으로 세상이 표현하는 감각들이, 실은 퇴화가 아니라 식물에 가까워지는 자연스런 과정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이 너무 아름답고 자연에 순응하는 고귀한 자세로 느껴졌다.
몇 가지 눈에 띄는 구절들을 더 옮겨보면.
산불이 난 숲에 들어가 본 뒤, 숲이라는 것은 나무와 나무 사이 간격까지를 다 포함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됐던 거죠. (같은책, 80쪽)
그가 안도현 시인의 '간격'이란 시를 보고 떠올린 식물성의 한 속성이다. 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권혁수 선생은 '그 숲에는 젊은 날의 아픔과 사랑'같은 것들이 있고, '나무, 벌레, 바람, 햇볕 모든 걸 포함해 숲'이라고 했다. 식물성이 품는 것들을 표현한 듯 하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일종의 예의 입니다. 가령 꽃을 그린다면 그건 꽃에 대한 '나의 입장' 같은 겁니다. (같은책, 80쪽)
꽃을 그리면 그것은 "꽃에 대한 나의 입장".
월간 <작은것이아름답다> 244호 : http://jaga.or.kr/?cat=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