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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지리산에서 한달] 13. 상추밭 알바, 후기 2012. 9. 1 상추에게 바침 상추여. 영롱한 이슬을 머금은 상추여. 어둑어둑한 새벽길 위를 빨간 장화를 신고 너를 찾아갔노라. 아직 주인이 오지 않은 비닐하우스에서 '나는 성실하니까'라고 흐뭇하게 웃고선 방석을 깔고 앉아 너의 잎새를 매만지기 시작했노라.태풍이 쓸고 간 너는 상추가 아닌 금추 - 한 근에 6천원을 호가한다는 너는 고기보다 귀한 몸. 너를 출하하기 위한 바쁜 주인 농부 부부의 손놀림.. 비바람이 부는 동안 버려졌던 너는 손바닥보다 크고 누렇게 떠버려 상품이 될 수 없는 수많은 잎새를 달고 있었지. 그것은 바로 '전잎' - 나는 너의 전잎을 따내고오늘 저녁 출하 될, 순결한 '상품 가치가 있는 어린잎'만 남기는 임무를 맡았다. "비바람을 견디느라 고생했구나.""조금 흠집이 났다고 버려지.. 더보기
[지리산에서 한달] 5. 금슬좋은 부부 2012. 8. 17 옆방에 부산에서 오신 60대 부부가 묵고 계신다. 본인들이 묵으실 방을 보자마자 "와~"하고 탄성을 지르셨다. "요즘도 이런 구들방이 있네요. 호호호 " 하면서 두 분은 어찌보면 '누추할' 방인데도 옛날 생각 난다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커피를 한 잔 타도 나눠마시고, 서로에게 존칭을 쓰며 (사투리인데도!), 설겆이는 아저씨께서 하시는(경상도 사나이신데도!) 금슬 좋은 부부 모습이 신기해서 나는 그들을 '원앙부부'라고 혼자 이름붙였다. 두분은 새벽부터 차 한잔을 나눠마시고 동네 산책을 나섰다. 그리고 밤에는 별을 함께 보러 가자고 기대에 잔뜩 부풀어 계셨다. "별 보면 나 따 줄거예요? " 라고 아주머니가 우스갯소리를 건네자"따 줘야지."라고 아저씨가 빙긋 웃으며 답하셨다. 참 보기.. 더보기
[지리산스테이] 3. 산책 2012.08.14 낚시를 좋아하는 40대 중반 남 L씨. 연상의 아내 K씨, 그들의 외동딸 C양. L씨가 끓여 낸 핸드드립을 마셨다. 여행다닐 때 옷가지를 하나 더 빼도, 좋아하는 커피 드립기는 챙긴다는 애호가 L씨. 엄마가 만든 샌드위치는 아이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잼을 바른 식빵에 계란과 토마토, 상추를 넣어 만든 유사 군대리아 표 맛이 기막혔다. 덕분에 커피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근사하게 시작했다.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면서 이렇게 하루 반나절도 채 만나지 않은 사람들과 상을 함께 할 날도 많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마을길을 걷다 걷기 좋은 길을 상세하게 그렸다. 휴가를 지리산 근처에서 보내기 위해 혼자 내려와 구례에서 1박, 이곳에서 1박했다는 31세 J양과 함께 '기분좋은 언덕길'을 따라 실상사로 .. 더보기
[지리산스테이] 2. 적응 2012.8.13 어제밤에 모기들과 한바탕 소동을 벌였습니다. 방에 불을 켜놓고 문을 열어놓은 통에, 모기들이 방으로 들어찬 거예요. 주인장이 말해줘서 뒤늦게 발을 내렸는데도 모기들은 끊이지 않고 어디선가 생겨나고... 빗자루를 들어 벽에 붙은 모기들을 쓸어담다가 고만 지쳐버렸습니다. 굳이 모기 한마리까지 방안에 들이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도시사람 꼴이 한심스럽긴 했지만, 저것들이 오늘 밤 내 피를 쪽쪽 빨아갈 걸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어요! 시골집에 사는 데 적응이 필요한것 같아요. 밤에는 스탠드만 켜놓고, 방문을 열어놓지 말아야겠습니다. 모기에 대해 모르던 것들- 19세기 프랑스가 건설하려다 실패한 파나마 운하의 실패원인은 모기였습니다. 수천명 노동자가 말라리아나 황열병으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더보기
[지리산스테이] 1. 첫인상 2012.08.12 YJ에게 멍하게 있다간 엉뚱한 데서 내려서 헤맬 뻔 했어요. 종점인 백무동에서 내린 다음에, 다시 버스를 갈아 타야 하는 줄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느낌이 왔어요. '이 근처같다.' 그래서 아저씨께 여쭤봤더니, 역시 이 버스는 곧 실상사에서 내려줄 거라네요. 그리고 여기가 바로 실상사 앞이라고. 와우. 난생 처음 와 본 동네인데도 단박에 '여기 참 좋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큰 절 앞이면 으레 관광차 수십대는 댈 수 있는 주차장이 있잖아요. 또 나무주걱이랑 염주를 파는 기념품점이나, 산채비빔밥이랑 막걸리 파는 음식점이 줄지어 있곤 하잖아요. 근데 여긴 음식점과 관광용품점은 딱 하나씩 있었고, 작은 매표소 옆에 실상사에서 직접 운영하는 친환경용품점이 있었어요. 신선했어요. 입구가 소박..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