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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시절기록

10주째 - 잠시 다른사람의 감각이 되면 어떨까요?

엊그제 아콩님이 “임신을 하고 나면 몸이 어떻게 바뀌는지 궁금하다”고 물으셔서 그 얘길 해보려 합니다.

주변 사람이 임신이나 출산을 하면, 온통 화제가 그 쪽으로 몰리는 게 솔직히 재미가 없던 터라, 저도 굳이 얘길 꺼내려하진 않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실 겪어보지 못했던 큰 변화이긴 해서 재미있는 얘기거리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말보단 글로 하는 편이 더 낫기도 하고요.

저는 임신한 지 10주 되었’대’요. (사실 언제 아이가 생겼는지 정확히 몰라요. 초음파 기계가 알려주더군요.)

이 시기의 산모들은 다음과 같은 변화를 겪는다고 해요.

- 신체적 증상-

    피곤하고 기운이 없으며 졸리다소변이 자주 마렵다구토를 동반하거나 동반하지 않은 상태에서 속이 메스껍다

    침이 많이 분비된다

    변비가 있다속쓰림과 소화불량 증상이 있고, 헛배가 부르며 배가 부풀어 오른다음식을 기피하거나 갈망한다

    식욕이 왕성하다. 특히 입덧이 가라앉으면 더욱 그렇다

    유륜이 검게 변하고, 유륜의 땀샘이 커다란 소름처럼 튀어나온다. 유방으로의 혈액공급이 증가함에 따라 피하에 푸르스름한 선이 나타난다.

    혈액 공급이 증가해 복부, 다리 등 온몸에서 정맥이 보인다이따금 두통이 생긴다. 현기증이 나타나거나 정신이 어지러워진다. 배가 조금 나오고 옷이 살짝 낀다.

- 정서적인 증상 - 1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짜증이 나며, 분별력이 떨어지고 자꾸만 눈물이 난다.

    의심, 두려움, 기쁨, 의기양양함 등의 감정 가운데 한 가지 혹은 모든 감정을 경험한다.

    차분해진다.

    아직도 임신했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하이디 머코프 & 샤론 마젤 (2008). The Bible 임신출산수업(4판). 다산사이언스. pp. 154-155

제가 겪는 변화는 굵은 글씨로 적었어요.

최근에 책을 사서 보기 시작했는데, 의학 서적이 얘기하는 임산부의 주수별 변화에 생각보다 많이 해당해서 신기했어요.

처음엔 임신으로 인한 몸의 변화에 별로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내가 겪는 변화가 자연스러운 일임을 알게 되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괜히 ‘정상’의 컨디션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게 되어서 요즘은 피곤하면 자고, 힘들면 못하겠다고 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각이 되다

이런 변화들 중에서 가장 적응이 안 되는게 달라진 식성이예요.

저는 먹는 걸 굉장히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이었거든요. 웬만큼 아파도, 식욕이 없다는 건 거의 경험해 본 적이 없어요. 하하.

길을 가다가 새로운 음식점이나 카페 간판을 발견하면 상상해보거나 기억해 두기도 하고, 다음 끼니에 무얼 먹을까 생각하면 엔도르핀이 돌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식사때마다 뭘 먹을지 생각하면 죄다 싫어지는 괴현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배는 고픈데, 음식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 메슥거리고 싫어져서 ‘이건 먹을 수 있겠다’라는 음식이 떠오르면 그걸 꼭 먹어야겠다고 집착하게 돼요. 고기류는 떠올리기만해도 힘들고, 무난한 것이 과일, 미역국, 비빔밥, 카레라서 계속 돌려먹기 하고 있어요.

미각이 예민해졌는지, 짜거나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면 혀의 미뢰가 하루종일 얼얼하게 느껴지고요.

후각도 예민해졌어요. 집 안에서도 집 밖의 담배냄새가 너무 잘 맡아져서 괴롭기도 하고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향수 냄새나 땀 냄새가 너무 강하게 코를 강타해서 코를 틀어막기도 해요. 나도 모르게 길빵러들을 째려보고 가는 일도 늘고 있습니다. 짜증도 늘고요. 우리집 주방에서 나는 호박 말리는 냄새를 참지 못해서 죄다 치우기도 했어요.

다른 사람의 식성, 다른 사람의 감각이 제게 들어와 있는 것 같아요.

식욕이 사라지거나 먹을 걸 기피하는 입덧의 원인에 대해서 아직 명확하게 규명된 건 없대요.

어떤 학자들은 비타민B6가 모자라서 그렇다기도 하고, 여러가지 설들이 있는데,

제가 가장 납득할만한 설은 ‘아이에게 위험한 물질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스스로 보호하는 기제 때문이라는 거예요.

태반이 없는 임신 초기에는 모체가 먹고 들이마시는 모든 물질이 아이한테 직접 전달되기 때문에, 차라리 안 먹고 말지 위험한 것은 피하려는 거지요. 하지만 ‘안정기’라고 부르는 임신 중기 (20주 부터)에 접어들면 그 때에는 태반이 형성돼서 아이가 모체로부터 직접 영양과 산소를 공급받는 게 아니라 태반에서 받게 되니까 엄청 식성이 좋아진대요. 이 얘길 들으니 좀 납득이 가더라고요.

이런 상태면, 백종원이라도 식성을 잃게 되지 않을까. ㅋㅋ 백종원이 임신하면 입맛이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하네요.

저는 후각도 그다지 날렵한 편은 아니었고,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 라며 공감이 많이 됩니다. 아마 그분들은 둔한 사람에 비해서 고통스러울 거예요. 사람마다 감각은 다 다르고, 꼭 둔한 게 좋지만은 않다는 걸 요즘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우울하고 짜증이 많다고? 정말?

저는 위에 열거한 임산부의 정서적 변화는 별로 제게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며칠 전, 좀 기묘한 일이 있었어요.

아니 ‘임산부뱃지’ 검색 자동완성에 왜 ‘메갈’이 나온담?

저는 평소에 임신하면 임산부 뱃지를 당당히 달고 다니겠노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임산부 뱃지를 달거나 임산부석에 앉을라치면 눈치가 보이는 거예요. 그간 임산부석에 앉는 일로 겪는 서러움, 임산부 뱃지를 둘러싼 논란의 글들을 보면서 겁도 먹고 생각이 너무 많아진 탓이었어요. 그러다가 임산부뱃지를 달고 당당하게 교통약자석에 앉는 젊은 임산부 모습을 보고 용기가 생겨서 나도 꼭 받아야겠다 생각이 들었죠.

집 앞에 보건지소가 있어서 갔더니 구청에 있는 보건소에 간다고 해요. 남편이 듣고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직접 가서 받아와야 하냐. 임산부 등록하면 바로 택배로 철분제랑 뱃지 받을 수 있잖아?’ 라고 해서 좋은 생각이라 동의해서, 보건복지부 제안에 적기도했어요.

위 이미지처럼 임산부뱃지 검색하면 ‘메갈’이 딸려나오는 시대고, 임신한 여성들이 눈치보면서 뱃지를 달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너무 슬픈 거예요. 직장 다니는 여성들은 출퇴근시간에 더 배려가 필요한데, 거주지 보건소에 다녀와야 하는 불편함이 왠 말이냐는 속상함이 올라왔어요.

사무실에 가는 길에 구청 보건소에 들렀는데, 딱 점심시간이더라고요. ‘그래도 일하는 여성들도 있는데, 점심이라고 안 하고 그러진 않겠지.’생각했는데, 왠걸. 보건소 불이 아예 꺼져 있어요. 너무너무 화가났어요. 1시가 되길 기다렸다가 갔더니만, 직원이 아직 1시 안 되었으니 1분 더 기다리라는 거예요.

임신확인서 들이밀고 뱃지 받으러 왔다고 하니까 쪽지를 주면서 인적사항과 출산예정일, 배우자 이름을 적게 했어요. 배우자 이름을 왜 적지? 싶어서 빈 칸으로 냈더니, “배우자 이름 쓰세요.”라고 해서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배우자 이름을 적어요?” 라고 했어요. 흠칫 놀라면서 그래도 적어야 시스템이 등록이 된대요. 여성의 아기를 ‘누구 씨앗인지’ 정부가 왜 관리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네요.

저는 왠일인지 그 때부터 너무 화가나고 눈물이 울컥했어요. 보건소 직원이 불편했는지 뱃지랑 기념품을 주면서 잘 가라고 하더라고요. 설명은 없냐고, 여기까지 이렇게 왔는데 이게 다냐고 하니까 그 때야 보건소에서 뭘 해주는지 (대부분 평일 낮에 받을 수 있는 서비스) 얘기해주더라고요. 저는, 왠지 너무 억울하고 화가나서 일어서면서 말했어요. “도대체 일하는 여성들은 어떻게 하라고 점심때도 문 닫고 평일에만 하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나라에서 아이를 어떻게 낳아요?” 라면서 눈물이 주루륵 나더라고요.

물론, 저는 직장에 매어있지 않으니 평일 낮에도 올 수 있죠. 이름을 적을 수 있는 배우자도 있죠.

그런데 내가 만약 직장 여성이라면, 배우자가 없는 여성이면 어쩌라고 - 라는 감정 이입이 심하게 되어서, 공적 서비스에 실망하고 분노한 마음에 내내 울면서 걸어왔어요.

이게 임산부가 감정 기복이 심하고 우울한 증세인가 - 싶기도 하고,

아님 그냥 누가 들어도 울 만큼 화가나는 건가 - 싶기도 하고. 애매하더라고요. 여튼 그날 저의 멘탈은 유릿장이었어요.

이렇게 요즘, 낯선 감각이나 감정을 지켜보면서 깜짝 깜짝 놀라기도 하고, 적응하기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군 드림


※ 이 글은 생산1팀 동료들에게 2018년 9월20일에 쓴 먼지레터로, 생산1팀 홈페이지에도 게시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