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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시절기록

임신으로 인한 기억력 감퇴를 의심하다

먼지님들

호환마마처럼 두려워하던 하반기가 아주 무르익었습니다. 벌써 코끝이 서늘해서 오늘 아침에는 난방텐트를 꺼내다 쳤어요. 날씨도 추워지거니와, 하반기가 호환마마처럼 두려웠던 이유는 '이 분야'(공적 자금을 받아서 하는 일들)의 일들이 대부분 연말에 몰려있기 때문입니다. 행정은 상반기에 계획을 세우느라 예산을 집행하지 않고, 대부분 일감을 하반기에 발주해서 12월까지 예산을 다 쓰려고 하거든요. 그 덕에 1월에서 3월까지는 손가락을 빨고, 일감이 갑자기 들어오는 하반기에는 웬만해서 체력이 닿는데까지 해보려고 하다보니 호환마마처럼 하반기에 대한 마음의 채비를 단단히 했더랬습니다. (한 두 사람이 하기에는 많은 정도지요.)

저희 조직은 작기 때문에 종종 다른 단체/회사랑 협업을 해요. 규모가 있는 일의 일부분을 맡기도 하고, 저희처럼 규모 작은 단체와 콜라보해서 일을 만들기도 해요. 큰 조직에 있을 때보다 협업을 하는 경험이 부쩍 많아진 것 같아요. 파트너들과 협업한다는 것은 같은 조직에서 동료와 일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경험인 것 같아요. 공유하는 조직문화나 프로세스가 없기 때문에 모든 걸 다 협의하고 조율해야 하는데, 그걸 해 주는 윗사람도 따로 없으니 협의할 게 엄청 많아져요. 

협업을 하면서 가장 놀라운 것은 '서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상식이 너무너무 다르다.'는 것이었어요. 업무 시간과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어떤 사람은 주말에도 일 협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하면 누구는 그게 이례적인 일이다. 누구는 카톡으로 파일을 주고받고 피드백을 바로 받으며 일하는 게 편하지만, 누구는 카톡으로 바로 즉답하는 것이 피곤하다. 누구는 메일 참조에 양쪽 모든 조직 사람들을 참조로 거는 것이 편하지만, 누구는 매번 모든 사람들을 참조 거는 것이나 참조된 메일을 받는것이 번거롭다. 등.), 초기에 일 내용을 협의할 때 큰 컨셉만 얘기한 후 수시로 조정해나가면서 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것이 몹시 괴롭기 때문에 정확히 정해진 일감과 일정대로 진행하길 선호하는 사람도 있어요. 일의 완성도에 있어 서로 '이정도면 되었어'라고 생각하는 감의 차이도 있고요. 그래서 이런 부분들은 초기에 서로 얘기해서 협의해 놓는게 좋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또, 재미있는 발견은 사람들마다 '나는 이것은 절대 참지 못할만큼 내게는 중요하다.'라고 여기는 고유의 부분들이 있는 거였어요. 강의를 많이 하는 분께서는 '다른 건 다 몰라도 강의 시간을 늘리거나 줄이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고 여기셨고, 어떤 분은 다과나 참여자에게 재미 요소를 정성껏 제대로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고요. 어떤 분은 약속 시간을 자주 바꾸거나 어기는 것을 힘들어하는 분도 있고요. - 이런 개인 차이는 같이 일 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인데(본인도 본인만의 특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점들로 서로 오해나 갈등이 있다가 일이 끝날 즈음에서야 그것이 이 사람 개인의 '매우 중요한 것'이자  '참기 어려운 부분'임을 알게 되었어요. (나에게 그런 것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아도 잘 모르겠어요.) 

...
서론이 길었는데요,
요즘 협업하는 곳이 있는데 담당자분이 개인적으로 속 깊은 얘기도 나누는 사이라서 일하기가 비교적 수월했어요. -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나중에 정작 그 일을 하려고 얘길 맞춰보면 "이건 이렇게 하기로 하지 않았어요?" 라고 하는데 저는 기억에 전혀 없거나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들이 툭툭 튀어나왔어요. 처음에는 서로 오해가 있었나보다 생각했다가, 나중에는 점점 이런 부분들이 많아지고, 상대적으로 제가 이 일에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얘길 많이 하는 편이다보니 최근에는 '내가 그 사람 말을 귀기울여 안 듣고 흘려보냈나보다.'라고 진지하게 반성했거든요. 심지어 약속 시간도 제가 잘못 기억한 적도 있으니까요. '임신하면 건망증이 생긴다든데 그래서 그런가?' 심각하게 생각하기도 했어요.(메모를 안 한 탓이겠죠. 친한 사이니까 긴장을 덜 해서 그랬는지도.) 
그런데 며칠 전에, 제 기억에는 그 분이 하기로 되어있는 연락을 제가 하기로 하지 않았냐는 말을 듣고 내 기억이 틀린 것만은 아니구나 알게 됐어요. 왜냐면 그 일은 제가 두번, 세번 확인을 했기 때문에 분명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면 이런 일은 왜 있는가? 왜 우리는 이렇게 기억상실증에 걸렸을까? 
너무 많은 얘기를 이리 저리 나누다보니 마지막에 확실하게 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문서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중간에서 확인해 줄 제삼자가 없이 둘이서 얘기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뭣 보담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상식선에서 대화를 해석하고 기억하거나,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요. 
모호하게 얘기했거나, 아니면 내키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렇게 하기로 했지."라고 생각해 버리는 게 아닐까란 거죠. 

처음엔 협업하면서 일어난, 위에서 열거한 수없는 오해와 갈등들, 그리고 협의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비용에 지친다고 생각되기도 했는데요,
이런 것들을 발견하고 글로 적어보니 무척 좋은 공부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먼지님들이 보기에 저는 어떤 특질(남들보다 엄청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절대 참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 이 글은 생산1팀 동료들에게 2018년10월30일에 쓴 먼지레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