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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시절기록

23주-여자인지 남자인지 알고싶지 않다

나는 태아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궁금하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알고 싶지 않다.

다행히도 나의 담당 의사는 알려주지 않는다. 남편은 궁금해서 초음파 사진을 혼자 이리보고 저리보고 하면서 알아보려고 하지만, 나는 말해주지 않는 의사선생님의 신중함이 고맙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일 것 같다. 내일 오전에 입체초음파라는 것을 볼테니, 아마 의학적 지식이 없는 우리라도 모를 순 없겠지. 성별을 모르고싶고, 몰라서 평온한 상태는 오늘 밤까지가 아닐까란 생각에, 이 마음을 기록해놔야겠다 생각이 들어서 부랴부랴 적는다. 


다행히 나에게 아이의 성별을 묻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가끔가다 물어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냥 모른다고 하니 편했다. 

아이가 둘인 친구가 있는데, (호의로)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고 싶어한다. 그 친구가 여러번 성별을 물어봐서, 

"왜 알고 싶으냐?"고 내가 물어보았고, 그 친구는 몹시 당황해 하면서 "이제까지 왜 궁금하냐고 질문 받은 적이 없어서 뭐라고 할 지 모르겠다."면서 엄청나게 섭섭해하기도 했다. (다행히 진실로 나는 모르므로, 모른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왜 아이의 성별을 묻는 질문에 답하기 싫을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일단 아이 성별에 대한 내 입장은 아무 상관이 없다이다. 아들이든 딸이든 어쩌란말인가? 나에겐 똑같고, 어차피 낳을 건데. 알아서 무엇하리?란 입장이기 때문에 알 필요가 없다. 

그렇담 남이 물어보는 게 왜 싫을까?

태아가 아들거나 딸이라서 좋거나 싫은 이해관계자가 있다면(우리 시할머니처럼) -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성별만으로 아이의 존재가 긍정되거나 부정되는 거라서 말도 안되게 싫고. 

태아가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 없는 사람이 호기심으로 가볍게 물어보는 거라면 - 굳이 대답해줘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 아이의 성별이 당신에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잖아요?) 물론 그냥 의례적인 관심의 표현으로, 호의로 물어보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가볍게 아이의 성별을 물어보는 것이 마치 "강아지 품종이 무엇이냐" 묻는 것처럼 들린다. "요크셔테리어구나" 혹은 "시츄라서 귀엽네"처럼 "딸이라서 좋겠네" "아들이라서 좋겠네"라는 조금은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들으면, 태아가 마치 애완동물처럼 귀여운 존재로만 여겨지는 것 같다. 사람인데.

안타깝게도 이 사회에서 성은 사람의 인생에 귀여움이나 선호 정도에 영향을 미치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엄청나게 무거운 이슈다. 아직 이 세상에서 성은 가정의 경제환경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이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성별에 따라 이 아이에게 내가 어떻게 가이드 해 줘야 할지 엄청나게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태아의 성별을 알고 싶지 않은 건, 그게 정말로 가볍고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의 인생에서 성이 너무나도 중요하고 무겁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태아의 성별은 왠지 굉장히 사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딸이면 어떻게 무엇을 가르치고, 아들이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나는 오래전부터 그것에 대한 생각을 아주 많이 했다. 아기를 갖기 전부터 그랬다. 성 불평등과 폭력이 엄연히 있는 이 사회에서 여자아이를, 또 남자아이를 어떻게 하면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거나 폭력을 가하지 않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심했다. 자신이 없기도 했다. 이제사 조금, 해 보아도 당황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던 터에 아이가 생겨서 신기하기도 했다(나에게는 많은 동료들과 좋은 가이드들이 있으니까). 

한 생명을 낳고 기른다는 거에 대해서 나는 마음의 준비가 얼마나 되어있는지 스스로 많이 물어보았다. 정말 어떤 아이라도 나는 같이 살 준비가 되어 있을까? 아이가 아파도 나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할까? 뉴스를 보면서 당하지 않는, 가해하지 않는 사람으로 키울 자신이 있을까란 생각도 많이 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도 감정 이입을 하며 읽었다. 자식은 내 맘대로 프로그램되지 않는다. 

아이를 낳는 건 애완동물을 기르는 게 아니니까 사람을 낳고 기르는 데 신중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나에게 "애를 안 갖냐"고 그렇게 가볍게 물어보는 사람들도 아주 싫었다. 내 삶은 랜덤하게 주어질 아이로 인해 엄청나게 바뀔텐데, 어떤 아이든지 받아들이고 같이 잘 살 수 있는 자신이 있는지를 자문하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내 삶에 대해서 저렇게 쉽게 말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혼 안 하냐 - 애 안 갖냐 - 성별이 뭐냐 - 그 다음은..? 

끝없이 이어지는 '세상 꼴 뵈기 싫은' 질문들에 답해주고 싶지 않다.